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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활동/이것저곳

커피를 마셔왔던 100년의 시간 그리고 다방(茶房)

by 우둥불 2021. 5. 14.

 

커피를 좋아한 고종과 다방(茶房)의 시초

 

커피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약 1890년 전후로 추정됩니다. 1895년에 발간된 유길준의 "서유견문(西遊見聞)"에 의하면, 커피는 1890년 경 중국을 통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기록되어 있고, 덧붙여 당시에 고종이 커피를 즐겨 마셨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로, 1896년 아관파천 때 러시아 공사관에서 처음 커피를 마신 고종은 그 맛에 매혹되어 이후 덕수궁에 돌아와서 '정관헌(靜觀軒)'이라는 서양식 건물을 지어놓고 여기서 서양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시곤 하였다 합니다. 이렇듯 '정관헌'은 당시의 왕인 고종이 다과를 들거나 연회를 열고 음악을 감상할 목적으로 만든 공간이었다면, 당시에 여행자를 위하여 새롭게 등장한 것으로 1884년 경 일본인 호리 리키타로가 인천에서 운영한 '대불호텔', 그리고 러시아 공사 웨베르의 처형인 손탁이 고종에게서 하사 받은 사저를 허물고 1902년에 지은 '손탁호텔'이 대표적인 호텔이었는데, 여기서 일반인들을 위하여 커피를 팔기 시작한 것이 다방의 시초가 된다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정관헌(靜觀軒)

 

 

그리고 '손탁호텔'에 이어서 등장한 '청목당(靑木堂)은 1층에서는 양주를 팔고, 2층에서는 차와 식사를 겸할 수 있게 하였는데, 당시에 '청목당'은 최고급 식당이면서 찻집으로서 장안의 명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1914년에 최고급 호텔 겸 다방의 역할을 한 '조선철도호텔'이 등장하면서 최고의 자리를 내주었다고 합니다.   

 

 

 

예술가, 문학가가 운영하던 다방(茶房) 

 

'다방'이라는 용어는 이미 고려시대에서 사용되었으나, 커피와 차를 파는 공간으로서의 '다방'은 커피가 들어오면서 새롭게 출연한 근대 공간입니다. 

 

찻집, 티룸, 다점, 끽다점(喫茶店) 등으로 불린 본격적인 의미의 다방은 주로 일본인들이 거주하였던 남촌일대(충무로 부근)에 먼저 등장하였습니다. 1923년경에 충무로 3가의 '후다미'와 충무로 2가의 '금강산'이 대표적인 것이었는데, 그러나 이러한 다방은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던 곳으로 이와 달리 우리나라 사람이 처음으로 창업한 다방은 1927년 봄에 영화감독 이경손이 화와이에서 데려온 묘령의 여인과 종로구 관훈동에 개업한 '카카듀'입니다. 그런데 운영자가 경영도 미숙한데다가 손님도 많지 않아 결국 수개월 만에 문을 닫고 이경손은 상해로 갔다고 합니다. 이어서 1929년 경에 심영(沈影)이 일본 미술학교 도안과를 졸업하고 영화배우 김인규(金寅圭)와 함께 지금의 종로 2가 YMCA 근처에 '멕시코'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다방이라는 공간은 1930년대나 가서야 제 구실을 하였다 합니다. 1930년대 초반에 이순석이 소공동에 문을 연 '낙랑파라'는 처음으로 수익을 내며 경영을 하였던 다방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다방을 경영하던 사람 중에는 예술가들이 많았는데, 그 덕분에 다방은 유흥공간이면서 동시에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는데 그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낙랑파라'를 개업한 이순석은 동경 우에노 미술학교 도안과를 졸업하였고, 여러 차례 다방을 운영하였던 이상(李箱)도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기사를 거쳐 시인이자 소설가로 성공을 하였는데, 결핵 때문에 요양을 갔던 황해도 배천 온천에서 만난 기생 금흉과 종로 1가 다방 '제비'를 개업한 것이 1933년경이었습니다. 다방 '제비'는 벽면이 유리로 되어 있어 밖의 풍경을 내다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경영난에 빠지면서 금흉과도 헤어진 이상은 '제비'의 문을 닫았고, 그 후에도 카페 '쯔루'를 비롯하여 종로에 '식스 . 나인'을 개업하였지만, 이를 허가했던 종로경찰서는 후에 '식스 . 나인'이 성 체위를 뜻하는 것을 알고 뒤늦게 영업 허가를 취소하였다고 합니다.    

 

 

명동거리 (일제시대때와 현재 비교)

 

 

그 사이에 극작가 유치진(柳致眞)은 소공동에 '프라타나'라는 다방을 개업하였고, 영화배우인 복혜숙은 인사동 입구에 '비너스'라는 다방을 열었습니다. '비너스'는 처음에는 차만 팔았지만, 나중에는 '바(bar)'를 겸해서 '주간에는 다실, 야간에는 살롱'의 형태로 운영되었다 합니다. 그밖에 음악평론가 김관이 명동에 명곡 다방으로 유명하였던 '에리제'를 열었다가 후에 '모나리자'로 이름을 바꾸었고, 영화감독 방한준이 명동에 개업한 '라일락'을 비롯하여 '오리온', '허리우드', '백룡' 등과 소공동의 '나전구' 와 '미모사', 서울역 앞의 '돌체' 등이 1940년대까지 다방의 명맥을 유지하였습니다.  

 

 

 

다방 - 문화공간(?), 무기력한 지식인의 집합소(?)

 

그 당시에 다방은 문인, 예술가, 학생들의 안식처이자 일탈의 장소로서, 1930년대에는 여러 다방을 전전하는 '다점순례'가 일종의 취미로 인식되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다방은 '지식인의 무기력, 무의지, 무이상, 권태, 물질적 결핍, 진퇴유곡(進退維谷)의 처지를 나타내는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차 한잔을 시켜놓고 몽상적인 표정을 지으며 예술가인 척하는 사람을 일러 '체병 환자'라고 하였고, 온종일 다방을 돌아다니면서 물만 마시는 사람을 '금붕어'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며, 다방에서 두세 시간씩 꼼짝 않고 앉아 있는 사람을 '벽화'라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다방은 지식인 실업자들의 집합소였으나, 한편으로는 문화인과 예술인의 집합장소이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앞에서 소개한 다방 '멕시코'는 한동안은 문사, 음악가, 배우, 신문 기자들을 위시한 문화인이 모여드는 중심 공간이었는데, 여기에는 이광수, 변영로, 김석송, 안석영, 구봉웅, 도상봉, 김정항, 김을한, 이승만, 서월영, 홍종인 등이 모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맞은편에 서양식 술집인 '낙원회관'이 들어서고 나서는 '멕시코'는 배우, 여급, 기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으로 변하였다고 합니다.

 

역시 앞에서 소개한 다방 '낙랑파라'는 당시 예술가들의 안식처이자 창작의 산실이었던 대표적인 다방이었는데, 영화배우 김연실이 '낙랑파라'의 마담이 되면서 이름을 '낙랑'으로 바꾸고 나서 이곳에는 안석영, 최정희, 정지용, 김상용 등과 함대훈, 이헌구, 김광섭과 같은 해외 문예파가 주로 출입을 하였다 합니다. 특히 '낙랑'은 구인회(九人會 ; 이종명. 김유영, 이태준, 이효석, 이무영, 유치진, 김기림, 정지용, 조용만)의 아지트이기도 하였습니다. 당시로서는 이렇다 할 개인 서재를 갖출 수 없었던 시절로서 '낙랑'은 단체 서재 겸 공동 토론장으로서 그 역할을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문인들은 다방에 모여서 시상을 닦거나 소설을 구상하다가 돌아갔고, 영화인들은 외국 영화나 외국 배우들에 대한 비평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듯 프랑스의 살롱문화를 지향한 우리나라의 다방문화는 일종의 문화공간으로서의 그 역할을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이를 증명하듯 각 다방의 마담이 참석한 좌담회("삼천리" 1936, 12)에서 사회자는 외국에서 발달한 '살롱문화'를 언급하면서 조선에서도 그러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다방의 운영자가 예술가가 많다 보니 다방의 특색에 맞게 문화와 관련된 다양한 행사가 이루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아래층은 차를 파는 곳이고, 위층은 아틀리에로 이루어진 '낙랑'에서는 '시성 괴테 백주년 기념제', 구본웅의 개인전, 제국대학 학생들의 '만돌린 연주회', 그리고 매주 금요일 빅타 음반회사의 신곡 연주회가 열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오늘날의 커피와 그들의 장소 

 

일제시대 문화공간의 역할을 하던 다방은 역사의 저편, 혹은 시골의 어느 구석으로 밀려나서, 오늘날에는 시골에서나 종종 볼 수 있는 다방으로서 나이 드신 어르신네들이 소일 삼아 읍내에 모여 담소를 나누는 공간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제시대 때에 여급의 시중을 받으며 술을 마실 수 있는 공간으로 지칭되던 '카페'가 '다방'을 대체하는 용어로 사용되면서 도시에서의 문화 공간으로 자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수많은 특정상표의 커피숍이 등장하여 카페를 대신하고 있고, 차 한 잔 시켜놓고 책을 읽을 수 있는 '북카페'도 출연하였습니다. 또한 차나 음식을 먹으며 회의나 세미나를 할 수 있는 공간도 생겼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기존의 카페에 영화, 노래, 인터넷 등을  즐길 수 있는 복합 문화 공간인 멀티 엔터테인먼트 카페도 문을 열었습니다.

 

이렇듯 오늘날에도 커피는 여전히 우리를 매혹하고 있으며, 5월이지만, 아직 아침이나 저녁 찬 바람에 썰렁대는 기온에 따뜻한 커피가 간절해지는데, 불현듯 떠오르는 추억에 울렁거리는 커피의 그 모든 것의 기원이 일제시대 다방이 자리하고 있음을 이 글을 통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