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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서정시의 원류 시인 - 김소월

by 우둥불 2021. 5. 24.

 

소월의 본명은 김정식(金廷植)으로 1902년에 함경북도 곽산에서 태어나 1934년에 고향에서 서른 두 살의 나이로 요절하기까지 한국 현대시사에 불멸의 발자국을 남긴 시인으로 민요시인, 국민시인, 전통시인으로 불릴 만큼 전통적인 율조와 정서를 완숙하게 승화한 시인이었습니다. 그의 시는 이별과 그리움에서 비롯하는 슬픔, 눈물 등을 주제로 하지만, 일상적인 언어를 통하여 독특하게 울림이 큰 표현을 이룩한 경지를 보여줬던 시인이었습니다.   

 

 

김소월의 모습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일제 강점기의 민족적인 삶의 갱생을 부르짖은 선구자는 아니었고, 그저 조만식 등 몇몇 민족 지도자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을 흠모하는 변방의 이름없는 소지식인에 불과했으며, 사망하기 전에는 평지라는 북녘의 소도시에서 신문사 지국을 꾸리다가 경제적으로 파산하여 비관하다가 결국 술과 마약으로 생을 마감한 평범한 젊은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러했던 그가 어떻게 우리 시대에서 최고로 칭송받는 민족 시인이 될 수 있었을까를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의 토속어를 가림새 있게 시적으로 승화하는데 발군의 역량을 발휘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또 이를 바탕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지녀온 우리의 민족적인 정서의 공감대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특히 1920년대 당시에 우리나라 시단(詩壇)을 전반적으로 지배했던 외래적 풍조에 대응하여 시에 토착적인 감수성을 적용하는데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비록 그의 육신은 민족이란 제단 위에 꽃다운 순교적 희생의 제물로 바쳐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정신 만은 그 어느 저항 시인보다도 동시대를 뼈저리게 상심하고, 삶의 현실에 대하여 비통해했다는 사실을 시로써 증명할 수 있을 만큼 저항적인 열정을 갖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소월의 시는 우리의 전통적인 한(恨)의 정서를 여성 화자를 통하여 보여주면서 향토적 소재와 설화적 내용을 민요적 기법으로 노래합니다. 그리고 서구 편향적인 초기 한국 현대 시단 형성 과정에서 한국적인 정감과 가락의 원형질을 확실하게 보여줬다는 점에서 민족시, 민중시의 규범이 되었고, 바로 이와같은 특징들이 그를 한국 현대 시인 가운데서 가장 많은 독자층을 거느리면서 또 학자들에 의하여 가장 많이 연구된 시인으로 만들어진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소월은 두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 김성도가 철도 공사장의 일본인들과 시비가 붙어 집단 폭행을 당하면서 한 달 가까이 의식 불명 상태에 빠져 있다가 이후에 정신 이상자가 되어 평생을 폐인으로 사는 불행한 아버지의 삶을 체험하게 됩니다. 따라서 소월은 광산을 경영하던 할아버지에 의하여 공주 김씨 문중에서 세운 남산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18세의 나이로 당시에 조만식이 교장으로 있던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는 데 힘쓰고 있던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에 입학하여 스승인 안서 김억을 만나게 됩니다.

 

소월은 오산학교 재학 중에 김억의 추천으로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雨適), "오과(午過)의 읍(泣), "그리워" 등을 '창조'지에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하게 됩니다. 그리고 곧 바로 "먼 후일", "만나려는 심사", 허트러진 모래 동으로", 죽으면" 등을 '학생계'에 발표하면서 시단의 관심을 끌기 시작하였습니다. 

 

 

오산학교 - 1907년 당시 평안북도 정주시 소재

 

그런데 소월이 오산학교 재학 중에 3·1운동의 여파로 오산학교가 문을 닫게 되므로 배재고보 5학년으로 다시 편입하면서 왕성한 시작을 발표하는데, 1922년에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개여울", "달맞이", "가는 봄" 등과 함께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이자 불후의 명작인 "진달래꽃"을 '개벽'지에 발표하여 크게 주목을 받게 됩니다. 

 

 

김소월 진달래꽃 초판본

 

소월의 시가 문단에 소개되자 그의 시에 대하여 일부 프롤레타리아 문학파를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우리말의 정서와 아름다움을 구현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 같은 평가는 당대 대표적인 문인들의 평가로서 소월은 이때부터 민요시인, 서정시인으로써 문단 내에서 입지를 굳혀가게 되었습니다.   

 

소월의 왕성한 활동은 1925년 그의 유일한 시집이 되어버린 "진달래꽃"을 간행한 그 해에 '개벽"지에 그의 시론 "시혼"을 발표하면서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이 시집에는 그동안 창작을 하였던 시 127편이 수록되게 되는데, 이 시집은 그의 전반기의 작품 성향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당시 서구 사조 흐름에 매몰되어 있던 우리 시단의 수준을 높이는데 이정표 역할을 하였다 할 수 있습니다. 

 

소월의 시가 민요시라는 견해는 형태론적인 근거와 소재론적인 근거에 바탕을 둡니다. 대표적 "진달래꽃"은 떠나버린 임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3·3·4조로 맞춘 율격입니다. 특히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등에는 임은 떠났지만 끝내 체념할 수 없다는 감정이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역설적인 감정은 결국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로 끝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소월이 주로 활동하던 시기인 1920년대 3·1운동 이후에 허무, 병, 꿈, 눈물 등의 어두운 이미지가 시단에 드리워져 그러한 시기에 민요적 율격에 우리 민족 고유의 서정에 잘 담아내어 한국적 서정시의 기틀을 공고히 다진 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소월의 시를 통용하는 한의 정서는 그의 부친이 정신이상자였다는 점과 그리고 무의미했던 그의 결혼생활이 우선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만 특히 소월 주변에 불행한 여성들의 생활과도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라 판단할 수 있는데, 남편이 젊은 나이에 폐인이 되어 평생 수발을 해야 했던 어머니, 또한 결혼 후에 항상 바깥으로 떠돌다 신의주에서 외간 여성과 동거를 하다가 요절을 하였던 숙부 김학도로 인하여 평생 한을 품고 살았던 그의 처인 숙모 계희영, 그리고 외숙부인 장경삼에게 버림을 받았던 외숙모, 그리고 또한 젊은 나이에 요절을 한 친구 김상섭으로 인하여 19살에 청상과부가 되어 어린 딸과 함께 홀로 살아야 했던 김상섭의 아내 등은 소월에게는 불행한 여인들로서의 뼈저린 한을 엿볼 수 있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 밖에도 일제강점기에 지식인이 겪어야 하는 절망감과 허무 의식도 한의 바탕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가 후기에 쓴 시를 보면 개인의 문제, 가정의 문제에서 더 나아가서 민족의식에 눈을 뜬 흔적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특히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라면"에서는 일제강점기의 현실인식과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한 것이  부각되어 나타납니다. 

 

그러나 소월이 한국시사의 하나의 원형적인 존재로 평가받고 있는 점은 가장 평범한 언어로 가장 비범한 시적 조직을 만들어 새로운 반응을 얻어냈다는 점입니다. 특히 소월의 시에는 '해, 봄, 바다, 밤 ,저녁'과 같은 시, 공간을 나타내는 단어와 '님'이라는 주체어, 그리고 '그립다, 가다, 오다, 설움, 슬픔'과 같은 동작이나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와 같은 단어들이 인간의 삶에 가까운 것이라 하면 시인으로서 소월의 능력은 별난 시어의 선택이 아닌 별난 배합과 조직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셈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단어와 단어를 묶고, 행과 행을 고도의 긴장관계로 엮은 소월의 시집은 한국의 전통적인 음수율과 음보율을 밝히는데 가장 긴요한 운율학의 자료로서도 널리 활동되고 있기도 합니다.  

 

더구나 우리 문학의 자산이었던 민요적 운율의 수용과 구비문학의 시적 변용, 한의 정서를 바탕으로 한국적 서정을 순도 높게 형상화했다는 점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소월만의 영역이었던 셈입니다. 따라서 서구 사조에 추수하기에 급급했던 1920년대에 우리 시단에 새로운 충격파를 던지며 자연스럽게 공감대를 이끌어 냈던 것이라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하여 소월은 한국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민족시인으로서 손꼽히며 토속적이고 전통적인 정한의 세계를 순도 높은 서정적 언어로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독자와 평가자들에 의하여 널리 호평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