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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관련/증도가(證道加)

獅子吼無畏說 百獸聞之皆腦裂 사자후무외설 백수문지개뇌열

by 우둥불 2021. 5. 25.

獅子吼無畏說 百獸聞之皆腦裂 사자후무외설 백수문지개뇌열

 

사자후의 두려움 없는 설법이여 뭇 짐승들이 들으면 모두 뇌가 찢어짐이여

 

 

사자는 모든 짐승들 가운데 가장 힘이 세기 때문에 또한 가장 마음의 평화가 큰 짐승이 된다. 이것은 가장 힘이 센 자만이 두려움이 없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의미로 우리 모두는 사자같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된다. 다시 말하면 해탈자는 천지(天地)간의 중생에 대한 두려움이 일체 없다는 의미로 이것은 곧 두려움을 가질 까닭이 근본적으로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선지식은 흔히 사자에 비유되곤 하는데, 이들은 왜 두려움이 없을까? 그것은 죽음을 정복하고 영원불변한 본체를 얻었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따라서 몸에 대한 집착이 완전히 소멸되었으니 병에 대한 두려움도 없고, 업장 또한 소멸되었으니 법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며 무지(無知)에서 오는 두려움도 없다. 얻음이 없는 절대 의식으로 가득 찬 신령(神靈)이 되었으니 사랑이나 존경, 인정을 얻지 못할까 하는 걱정도 두려움도 없는데, 이것은 전체적으로 자기 존재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마음껏 삶을 누릴 수가 있고 대자유를 만끽하며 소리를 지르거나 한가롭게 노닐 수 있는 것이다.

 

선지식이 하는 설법을 사자후라고 하며, 이는 각자가 향상의 길로 나아가게끔 일깨워주지만, 이러한 사자후에 대하여 대상마다 다르게 반응을 한다. 하근기자(下根機者)는 사자가 부럽지만 자기 욕망에 대하여 미련을 갖고 애지중지하므로 두려움이 커서 사람의 소리만 받아들이며 사자와의 경계를 강하게 긋게 된다. 또한 중근기자(中根機者)는 사자후에 대하여 두려움이 있기도 하지만, 자기도 사자후가 될 수 있다는 희망과 결심으로 욕심을 어느 정도 갖고 사자를 보고 배우게 된다. 하지만, 사자후의 내용은 마음에 많이 거슬리니 껍데기를 한꺼플만 힘들게 벗고 도()를 핑계 삼아서 게으름을 부리게 된다. 반면에 상근기자(上根機者)는 사자후를 들으면 사자를 보고 배울 것도 없이 정신이 번쩍 들면서 자기 자신도 똑같은 사자임을 금방 알아챈다. 그리고 두려움이 없이 껍데기를 단번에 벗어던져버리고 사자의 먹이를 먹고 사자의 눈으로 보고 사자의 소리를 낸다.

 

대상마다 이러하므로 선지식의 사자후는 그러한 대상마다 다르게 대하곤 하는데, 하근기자에게는 사자후가 해롭게 되므로 사자후를 내지 않고 방편만 살짝 대하게 한다. 반면에 중근기자에게는 인정을 섞는 가운데 부드러운 사자후를 내면서 도()에서 후퇴하지 않도록 해준다. 그러나 상근기자를 대할 때는 곧바로 찌르며 인정사정 보지 않고 사자후를 크게 낸다. 왜냐하면 상근기자일지라도 아직 구경(究竟)까지 깨닫지 못한 상태이어서 잘못하여 선지식이나 불법 등 의 진리를 향하여 마음이 편향될까 염려가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각자의 마음과 힘에 따라 사자후를 들어도 그 덕을 보는 차원이 각기 다르게 되는 것은 선지식의 일체가 도()의 용()인 만큼 오로지 자비심에서 상대에 맞도록 자연스럽게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까움과 멀리함이 별개로 없으니 사적인 감정이나 이해득실을 따지는 마음은 눈곱만큼도 따로 없다.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선지식의 설법을 무외설(無畏說)이라고도 한다. 이른바 두려움이 없는 설법인 것이다. ()함이 대도(大道)로부터 나오니 진리인 것이라 업()이 지어지지 않고 자타(自他)를 속이지도 않아서 설함에 걸림이 없어 두려움이 없게 된다. 또한 설함으로 얻는 목숨과 명예와 재물 등 각종 이해득실을 따짐이 없이 맘껏 설하니 두려움이 없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본모습을 일깨우고 큰 힘을 전해주어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번뇌망상과 두려움이 사라지게 하고 큰 용기를 불러일으키니 두려움을 없애주는 설법이 된다. 이것은 불이(不二)에 바탕을 둔 설함이니 설함이 없는 설법이고 상대의 상()에 걸리지 않아 두려움이 없는 설법이다. 따라서 사자후는 좋은 말이고 좋은 말은 흠이 없으니 좋음은 곧 좋고 나쁜 분별을 넘어 선 차원의 좋음인지라 두려움이 없다. 그래서 사자후는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도()에 즉()한 말이 되어 좋은 말이 된다. 당연히 성인(聖人)은 어질지 않게 된다.

 

사자후를 뭇 짐승들이 들으면 모두 뇌가 찢어진다고 하는 것은 사자의 포효소리를 들으면 모두가 화들짝 놀라게 되어 이때 그 놀라움에 의하여 온갖 잡념과 망상이 순간적으로 사라지며 바로 자기 존재의 인식에 대한 일대 변혁이 생김을 뜻한다. 사자 소리를 듣고서 ? 나는 왜 이렇게 살아가고 이렇게 밖에 소리를 못 낼까? 내가 본래 이런 모습일까?’ 하는 의문 정도는 들어야 사자후의 덕을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