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방따라 원망과 친한 마음 일어나지 않으면
하필 남이 없는 자비인욕의 힘 나타내 무엇할건가
스스로 자신에게 평생 무엇을 주고 살아왔는가? 자신에게 큰 지혜를 주었는가? 큰 복을 주고 있는가? 큰 힘을 주고 있는가? 한평생 부족함 없이 편하게 사는 것은 자기 자신과 더불어 누리는 것일 뿐, 실제는 자기 자신에게 주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삶이다. 그저 자신이 갖고 나온 곳간을 비우는 것이니 이는 곧 복진타락(福盡墮落)이 되는 것뿐이다. 따라서 고통 없이 살아왔지만 정작 자기 자신에게는 준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결국은 삶이 허무하고 우울해지는 것이다.
원망과 친한 마음은 모두가 망심(妄心)으로 그러한 망심의 유혹과 채찍을 견디게 하는 고행인욕(苦行忍慾)은 자신에게 참음(忍)을 주는 것인데, 여기서 작은 인(忍)을 주면 마음의 병을 만들고, 큰 인(忍)을 주면 자유를 얻게 된다. 그래서 큰 忍으로 인하여 자기 자신이 곧 忍이 되는 것이니 따로 참는 마음을 낼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작은 忍은 참는 자기가 있지만, 큰 忍은 참는 자기가 따로 없으므로 큰 忍이 되는 것은 비방을 받으면 원수로 여기고, 칭찬을 받으면 애인처럼 여기는 그러한 마음의 뿌리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면 생겨남이 없는 자비인욕(慈悲忍慾)의 힘을 굳이 나타내 보여줄 필요가 없다. 즉, 자기가 부동(不動)이 되면 상대를 최상의 덕목으로 대하지도 않으며, 스스로 인욕의 힘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줄 이유도 없고, 인욕이란 용어 자체도 떨어져 나간다. 그렇기에 내가 너를 위해 참는다고 하는 자비도 나타낼 이유가 없다. 만일 그렇지 않고 은근히 과시하는 아상(我相)이 남아 있다면, 인욕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나타냄은 곧 산란함을 이루니 어둠이다. 무생자인(無生慈忍)이란 바로 나와 남의 분별심이 떨어져 나가 상대로 인하여 내 마음이 나지 않는 경지에서의 자비와 인욕인 것이다. 즉, 인욕바라밀이 완성된 상태이고 나와 남의 구별이 아직 남아 있는 조그만 자비가 아니라 자타불이(自他不二)가 된 대자대비(大慈大悲)인 것이다. 무생자인의 힘이란 것은 이러한 대자대비와 완성된 인욕바라밀이 가지고 있는 힘으로써 부처님이나 신(神)과 똑같은 위험을 가지는 힘이며, 도(道)의 용(用)을 이루는 힘이기도 하다. 여기에서는 원수와 부모가 반대가 아니고, 둘도 아니며, 그렇다고 하나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명백하게 악하고 잘못된 것은 정(正)이 아니기 때문에 무조건 참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不動에서 나오는 분노는 태풍의 눈과 비슷하여 법을 통째로 움직여서 악심(惡心)을 단박에 제압하여 소멸시켜 버린다. 여기에는 동정도 차별도 없다. 오로지 신(神)의 위엄만이 있을 뿐이다. 선지식은 금강도(金剛刀)와 감로병(甘露甁)을 함께 쥐고 있기 때문에 잘못 걸리면 뼈도 못 추리고 꼼짝없이 상(相)이 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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