宗亦通設亦通 定慧圓明不滯空 종역통설역통 정혜원명불체공
종취도 통하고 설법도 통함이여 선정과 지혜가 원만하게 밝아 공에 체류하지 않는도다.
종취(宗趣 ; 스스로 깨달은 궁극적인 진리)가 통한다는 것은 자성(自性)을 보고 구경각(究竟覺 ; 수행을 하여 얻는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하여 중도를 증득한 것이다. 법을 깨우쳐서 대지혜광명을 밝혀 윤회를 벗어나 해탈열반한 것으로 업식(業識)덩어리인 자기의 무명(無明)까지 격파하여 드디어 대우주의 신령세계와 통하여 온전히 하나가 된 것이다.
여기서 종취가 체(體)라면 설법은 용(用)이 된다. 그리고 이 둘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불성을 근본으로 하나로 이어져 있다. 따라서 설법도 자연스럽고 종취에 어긋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설법은 이러한 종취로부터 자연스럽고 진실하게 나와 많은 이들에게 통하게 된다. 이러한 설법은 ‘불취어상 여여부동(不取於相 如如不動)’으로 하는 설법이다. 즉, 두뇌에서 생각해서 나오는 법문이 아니라 불성으로부터 자비와 지혜가 한 덩어리가 되어 흘러나오는 법문이다. 그러므로 자비의 말이요, 지혜의 말이요, 무적(無敵)의 말이다. 또한 대우주와 이어져 있는 온몸을 통하여 나오는 것이니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黙動淨)이 모두 법을 설하는 것이다. 곧, 천지자연의 대도(大道)가 내는 소리이다.
그리고 종취가 통한 설법은 경전에 나와 있는 것을 그대로 옮기거나 타인의 설법을 본뜨지 않는다. 종취가 이미 통하여 어디서 가져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대우주와 신(神)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온다. 그러므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종취이고 설법인 것이다.
공(空)에 머물지 않는다는 말은 설법의 내용은 물론이고 색(色)에도 머물지 않아야 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리고 색(色)은 없고 온통 공(空)만 말하거나, 공(空)은 없고 색(色)만 말하는 것은 변견(邊見)일 뿐이다. 따라서 서로 즉(卽 ; 붙여)해서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현상이나 혹은 관념에 빠져서 더욱 중생화되거나 산 속에 누워 있는 좀비신세가 될 뿐이다.
도(道)는 철학도 사상도 아니기에, 생각으로서 그럴듯하게 지어내봤자 거짓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공(空)에 머무는 도인이나 색(色)에 머무는 중생은 서로가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색(色)과 공(空)에 각각 끌려 다니지 않도록 자기존재가 여여부동(如如不動)하게 되는 것이 제일 우선이다. 설법은 그 후에 하여도 늦지 않다. 대우주를 꽉 채워 원만하게 되면 어디든 따로 머무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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