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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활동/이것저곳

무신(武神) 관우

by 우둥불 2020. 9. 3.


관우의 자는 운장(雲長)인데, 각종 神을 섬기는 이들에게는 그 이름 앞에 무신(武神)을 붙이는 것을 어색해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삼국지연의 가'에서 무력으로 최고치를 따지자면 관우보다는 여포가 그 이름을 떨칠 것이지만, 무신으로 불리우는 것은 여포가 아니라 관우가 된 사유가 있습니다.

촉한의 무장이었던 관우가 무(武)의 신으로 추앙받게 된 것은 명, 청대의 소설화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가'가 유행하면서 입니다. 그 이전에는 무장이었던 관우가 위진남북조시대에서 장군이었고, 수, 당대에는 무성왕묘(武成王廟) 종사를 통하여 국가의 사전(祀典)에 편입되었으며, 송, 원대에는 후(侯)에서 공(公)으로 그리고 왕(王)으로 추존되다가 결국 명, 청대에 와서 신격화가 절정에 달하여 황제(皇帝)에 등극하고 급기야 신령(神靈)으로 숭배되었습니다. 이러한 것이 종교계로도 확산되어 불교에서는 사찰의 수호신으로, 도교에서는 만능수호신, 유교에서는 충의(忠義)의 무신으로 이용되었습니다.

중국에서 이러하던 관우를 조선에서 섬기며 제사를 지내는 관왕묘의 건립은 정유재란 때부터 이루어졌는데, 그 계기가 1568년 당시 조선에 원정을 왔던 명나라 군이 남묘를 건립하고 그 이듬 해에 동묘를 건립하면서 였습니다. 그러다가 고종대에 와서 북묘와 서묘가 건립되어 당시에는 한양땅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특히 조선시대 고종대에 와서 관우신앙에 대한 확산이 절정에 달하였는데, 임오군란 중에 충주로 피신갔던 명성황후의 환궁시기를 자칭 관성제군의 딸이라 주장한 진령군이 정확하게 맞히면서 왕가에서는 그러한 무신 관우에게 자손번창과 복운을 바라며 1883년에 북묘를 건립하였고, 그 이후 갑신정변 때도 자신들의 안녕을 바라며 북묘로 피신할 정도로 무신 관우를 의지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02년에 엄비가 고종에게 건의하여 서묘를 건립하면서 관왕을 관제로 격상시키기도 하였습니다.  

현재 인왕산에 있는 국사당은 1925년에 남산에서 인왕산으로 옮긴 것인데, 현존하는 무신도 중에 가장 뛰어난 필력을 보여주는 국사당의 무신도는 당주(堂主)의 구술(口述)로 신상의 명칭이 구전되어 전해져서 도상과 성격이 모호한 상태이지만, 그 중에 투구와 갑옷을 걸친 장군상은 관우도일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관우의 신상은 전쟁에서 나라와 백성을 보호하는 전쟁의 신으로 제작되기도 하고, 유가에서는 충절과 의리를 실현한 도덕적이고 청렴한 관리의 모습으로, 불가에서는 가람신이자 관제보살(關帝普薩)로, 또 상인들에게는 재복신으로 제작되고 숭배되어 왔습니다.

이것은 결국 관우가 국가와 백성을 위하여 목숨을 받쳐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한 죽음을 당하여 무속신령이 되어 지배계층은 물론 일반 백성들의 억울한 마음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최고의 신으로 자리맺임 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여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무신 관우는 전국의 각 신당에 봉안되어 중국에서 건너온 일개의 장수이지만, 우리의 토속신 사이에서 당당하게 신으로 자리맺임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