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문인들이 산을 등반하고 쓴 산행 기행문은 수없이 많지만, 서울 근교에 있는 산은 비록 명산이라 할지라도 산에 올랐던 기행문은 거의 쓰여지지 않았습니다. 서울 중심부에 위치한 남산 같은 경우는 기행문 커녕 산을 오르는 것도 하지 않고, 요즘에는 남산이라 함은 순환로를 따라 건강의 목적으로 걷는 정도로 접근하곤 합니다. 심지어는 서울의 소금강이라고 칭하는 북한산도 기행문이 거의 없으니 인왕산 같은 경우는 살펴보지 않아도 뻔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들 산들이 만약 다른 지역에 있었다면 서울의 문인들은 뻔질나게 산을 오르내리면서 많은 기행문들이 쓰여졌으리라 추정할 수 있는 명산들인 것입니다.
유서산기(遊西山記)라는 인왕산 기행문을 썻던 인왕산 밑에 살았던 조선후기에 문신이자 학자인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 1570~1652)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인왕산은 예로부터 서울의 서북부 풍경을 상징하듯 바위 산이 절경이었는데, 청음은 형 김상용(金尙容)과 함께 북악산과 인왕산 아래 동네에 살았고, 20세기 초반까지 후손들이 이곳에서 대를 이어가며 살았습니다. 조선 후기에 왕비를 3명이나 배출한 명문가 집안으로서 청음의 집안은 현재의 지형으로 살펴보면 청와대에서 옥인동까지 넓은 곳을 터전으로 삼아 곳곳에 유적이 남아 있는데, 지금의 청운초등학교 옆 청운현대아파트의 큰 바위에 새겨진 "백세청풍(百世淸風)"은 당시의 주소 순화방(順化坊) 창의동(彰義洞) 청풍계(淸風溪)로 김상용의 집이 있었던 곳입니다.
청음 김상헌은 북악산과 인왕산이 저택의 뒷산이라서 산을 자주 올랐을 법도 하지만 놀랍게도 태어난 이래 45세가 될 때까지 한번도 뒷산인 이 산들을 오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무심했던 청음이 인왕산을 겨우 오르게 된 동기가 어머니의 병환때문이었다고 합니다.
1614년 가을, 어머니의 눈병으로 인왕산 약숫물이 효험이 있다는 소문에 형 김상용과 함께 아들, 조카를 데리고 약수를 뜨러 산에 올랐다고 합니다. 산에 오르다가 인왕산 초입에서 청음이 처음 맞닥뜨린 것이 조선 중종 때 대제학을 지낸 소세양(蘇世讓 ; 1486~1562)의 옛 집터로 폐가가 된 청심당(淸心堂)이었습니다. 당시에 부귀를 누린 소세양은 건축에 안목이 있고 당대의 문인들과 친하게 지내 후세에 명성과 명작을 남길 법도 하였지만, 결과는 폐가로 남게 되었음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이듬 해인 1616년에 광해군은 이 자리가 왕기(王氣)가 있다하여 인경궁(仁慶宮)을 지었는데, 현재에 자수궁터라는 표지석이 있는 그 자리이다. 따라서 그 마저도 있던 소세양의 흔적은 씻은 듯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청음의 일행은 가파른 돌길에서 말을 내려서 걸어올랐는데, 얼마 가지 않아서 큰 바위 아래서 흘러나오는 약수를 발견하였습니다. 이곳은 지금의 석굴암이 있는 장소로 무당이 치성을 드리는 기도처인데, 인왕산은 영험한 기도처로 알려져 현재도 곳곳에 기도하는 곳이 많은 곳이기도 합니다. 청음은 석굴암 주변을 살펴보고 조선 태조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인왕사(仁旺寺)터로 추정하기도 하였고, 그러면서 청음은 인왕산을 다음과 같이 품평을 하였습니다.
산은 바위 하나로 이루어져 산마루부터 중턱까지 높다란 석대와 가파른 바위, 깍아지른 듯한 봉우리와 첩첩한 절벽이 곧추서거나 옆으로 늘어서 있어서 올려다 보면 병기를 세워놓고 갑옷을 쌓아둔 듯하여 기이하고 웅장한 그 모습은 형용하기가 어렵다. 산줄기가 이어져 묏부리가 되고 못부리들이 나눠져 골짜기를 이루었는데 골짜기마다 모두 샘이 있어 맑은 물이 바위에 부딪혀 수많은 옥돌이 쟁그렁거리듯 하니 물과 바위의 경치가 참으로 도성 안에서 제일가는 곳이다.
그러나 청음은 마흔 중반의 나이에 노쇠함을 탓하며 정상까지 오르지 못하였는데, 현재의 40대의 나이는 거의 청년기로 여기는 지금의 시점으로 살펴보면 이러한 내용은 결국 고금(古今)의 차이를 느끼게하는 내용이 되는 듯 합니다. 그러나 청음 일행은 지금의 범바위라고 불리우는 남쪽 봉우리에 올라 도성을 내려보았는데, 대체로 일반적인 사람이 도성을 조망한다면 도성의 사람이 사는 여염집과 우람한 궁궐과 관아와 사대문 그리고 종로를 따라있는 큰길의 인파와 남산 북악을 보면서 감탄해야 하는데, 우습게도 청음은 봉우리 아래에 거대한 술창고를 보면서 세상사람들을 술 취한 미친 놈으로 만들까 우려하였고, 남산에 구불구불한 성곽을 보고 용이 누운 듯한 모습에서 나라를 구할 와룡(臥龍)선생이 살고 있기를 바랬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난지 23년이 지났건만 요순 임금을 만들 인재가 나오지 않는다고 푸념을 하였고, 폐허가 되어 잡초만 무성한 경복궁을 보고 정궁을 저렇게 만든 것은 간신배들의 소행이라고 분노하였습니다. 그리고 창덕궁의 장관도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았고 흥인문 안쪽 종로거리를 오가는 인파를 보며 이익만 좆는 사람들 뿐이라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 보았던 것입니다. 또한 동쪽에 멀리 보이는 불암산을 보면서 남산과 북악 인왕산과 함께 도성을 감싸고 있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을 표현하면서 일반적으로 이렇게 산에 올라 도성의 경치를 감탄할 그 자리에서 청음은 그저 탄식과 걱정만 늘어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청음은 나라의 안위를 자기 일같이 여겼던 충정을 지닌 사람으로서 대쪽같은 성질에 한때는 여진족(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간을 옥고를 치렀던 경험이 있는 강직한 문신으로서 이 당시는 위태롭고 조마조마한 광해군 치하에 있던 시기로서 왜란을 거치고 안정을 찾아가는 도성을 한눈에 내려다 보면서 기쁨보다는 걱정이, 안도감보다는 불안감이 앞섰던 것인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인왕산을 언제 다시 오를지는 기약하지 못하나 그때에 오를 때는 오늘의 기분과는 전혀 달랐으면 좋겠다고 썻는데, 그러나 이때의 청음의 안위를 장담할 시기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인왕산 범바위에 올라 도성을 바라보며 청음의 가슴을 짓누르던 불안감은 결국 현실로 나타나 인조반정과 뒤를 이은 병자호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척화론의 대표주자인 청음은 결과적으로 그러한 인왕산 아래서 편안하게 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끝
'야외활동 > 이것저곳'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살곶이 다리 (0) | 2020.09.23 |
---|---|
무신(武神) 관우 (0) | 2020.09.03 |
막걸리(료 ; 醪) (0) | 2020.08.04 |
서로 배려하고 존중했던 조선시대 부부간의 예의 (0) | 2020.07.03 |
1970년대 서울 풍경 (0) | 2020.05.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