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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활동/이것저곳

살곶이 다리

by 우둥불 2020. 9. 23.

 

 

 

압구정도(겸재 정선)

그림 왼쪽 윗면에 살곶이 벌과 저자도가 아스라이 보이고, 중랑천이 흐르는 곳에 살곶이 다리 모습이 뚜렷하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살곶이 다리와 연관된 야사


이방원은 두 차례에 왕자의 난으로 조선 건국 초기부터 피바람을 불러일으켰는데, 조선 건국 이전에는 정몽주를 죽이고, 건국 이후에는 최고의 신하라 여길 수 있는 정도전마저 친위 쿠데타로 죽여 버렸습니다. 이성계 입장에서 보면 둘 다 새로 만든 나라에서 같이 일을 하고 싶었던 신하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는 이성계가 실질적인 왕의 자리를 아들에게 강제로 빼앗기다시피 하여 함흥으로 돌아가 은거해 버립니다. 그래서 이방원이 아버지께 용서를 빌면서 여러 신하들을 보내 아버지를 달래 보려고 하였으나, 모두 죽임을 당하거나 갇히곤 하였다 하여 이를 이르러 함흥차사라 불렀습니다.

 

하지만 이성계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할 수 없이 한양으로 되돌아오는 중에 멀리까지 마중 나온 이방원을 향해 활시위를 당겨 화살을 쏘았는데, 이방원이 나무기둥 뒤로 숨어 아버지가 쏜 화살을 무사히 피하게 됩니다. 신궁(神弓)으로 전하여지는 이성계의 화살이 빗맞은 것입니다. 이에 이성계는 이것은 하늘의 뜻임을 인정하고 이방원을 왕으로 인정하게 되는 야사에서 전하여지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난 곳이 바로 청계천이 중랑천과 만나 한강으로 흘러드는 길목 동측에 너르게 펼쳐진 벌판으로 '살곶이 벌'이라 불리었는데, 다른 이름으론 화살(箭)을 쏘았던 곳이 물 쪽으로 삐죽이 튀어나온 땅(串)이란 의미로 '전곶평(箭串坪)'이라고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이 오늘날에 뚝섬지역입니다.

 

이성계가 활을 쏜 그곳이 바로 '살곶이'로서, 왕십리와 뚝섬을 가르며 흐르는 중랑천 하류에 위치한 이곳은 길이 75.75m, 폭 6m의 거대한 널돌다리가 놓여 있습니다. 당시에 도성에서 함경도, 강원도, 경상도로 나아가는 주요 길목이었던 곳입니다.  그 당시 장면은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이 그린 위의 '압구정도'에서 전곶평과 저자도(楮子島) 그리고 살곶이 다리가 아스라이 환상처럼 펼쳐진 모습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살곶이 다리


살곶이 다리 교각을 떠받치는 지대석은 주춧돌 모양입니다. 하천 바닥에 여러 개 돌을 박아 물살 흐름을 제어한 흔적이 뚜렷하며, 교각은 횡으로 4열입니다. 4열 교각에 3개 멍엣돌을 얹는데, 멍엣돌에는 4열 귀틀돌을 걸어 3열 우물마루 형상 상판이 만들어졌습니다. 종으로는 21열 교각을 세웠고, 길이 75.75m 다리에 21열 교각은 평균경간이 3.44m라는 의미입니다. 돌난간은 따로 세우진 않았습니다.

 

횡 4열 돌기둥 중 가운데 두 개를 가장자리 돌기둥보다 약간 낮게 만들었는데, 이는 교량 상부에 전달되는 힘(하중)을 분산하려는 계산된 설계로 보입니다. 다리 안쪽으로 하중이 쏠리게 함으로써, 응력(應力 ; 물체가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의 작용에 저항하여 원형을 지켜내려 하는 힘)을 분산시켜 구조물의 안정성을 높이려는 장치로 보입니다.

교각을 이루고 있는 돌기둥 두께는 제각각이며, 다만, 가운데 교각에 걸리는 멍엣돌이나 귀틀돌은 가장자리에 있는 그것들보다 조금 두껍습니다. 다리 부재의 높낮이와 두께를 달리 함으로써 상판 평탄성 확보와 다리에 가해지는 외부 힘을 적절히 분산시키려는 지혜를 발휘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리 양측 교대는 크고 묵직한 석축을 쌓아 축조한 것이 2013년 발굴복원과정에서 확인되었습니다.

 


 

 

살곶이 다리 하부

가운데 2개 교각이 양측 가장자리 교각 보다 높이가 낮다. 대신가운데 결구된 멍엣돌을 두껍게 하여 상판 평탄성을 유지하려한 모습이 보인다. 이는 응력을 고려한 과학적인 설계가 이뤄졌다는 반증이다. 바닥에는 돌을 박아 물살 흐름을 제어한 흔적이 보인다. < 문화재청 >

 

 

후에 이방원은 당시에 살곶이 벌에서 샛강을 건너 한강 하중도인 저자도에 별궁 형식의 정자를 지어 기거하다시피 합니다. 그것은 세종 1년(1419년 2월 21일) 실록에 '상왕이 살곶이 벌 동쪽 증산(甑山) 근처에 이궁을 건립하여, 낙천정(樂天亭)이라 이름 하였다'는 기록이 전하여집니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난 이방원은 이곳 살곶이 벌에서 사냥과 군사훈련을 즐겨했다고 하는데, 이방원이 살곶이 들판과 훈련장, 사냥터, 그리고 저자도에 있던 낙천정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알 수 있는 기록들입니다. 특히 낙천정에서 바라본 한강 경치가 일품이었다고 전하는데, 이방원은 이 정자를 수시로 드나들어 다녔다고 전해집니다. 

 

그것과 연관된 기록으로 세종 2년(1420년 5월 6일) 실록엔 '상왕의 명으로 영의정 유정현과 박자청에게 살곶이 내(川)에 다리 놓는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공사는 이방원의 명으로 약 20여 일 후에 중단되었는데, 도성 안에 있는 개천 정비에 모든 인력과 장비가 쓰여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합니다. 

 

살곶이 널돌다리가 완공된 시기는 최초 가설 시작으로부터 무려 63년이 지난 성종 14년(1483년)이라 합니다. 다리가 완공된 후 평지를 걷는 느낌이 든다는 의미로 '제반교(濟盤橋)'라고 불리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 후대의 왕들도 이곳 살곶이 벌에서 사냥이나 군사훈련을 실시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자주 등장합니다. 하지만 살곶이 다리 건설에 대한 뚜렷한 기록은 없으므로 아쉬움이 남습니다.

 

살곶이 다리는 당시에는 도성에서 광주, 이천을 거쳐 충주로 가는 주요 길목이었습니다. 또한 문경새재를 넘어 영남대로에서 올라오는 물산이 지나는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광나루와 송파를 지나 영동 강릉과 함경도 원산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살곶이 다리는 이후에 흥선대원군 경복궁 중건 공사 때 석재로 징발당함으로써 훼손되고, 을축년 대홍수 때엔 일부의 부재가 유실되기도 합니다.

 

그 후 일반백성들의 필요에 의해서 계속 보수하여 쓴 것으로 보이는데, 결국 1938년에 다리 아래쪽으로 '성동교'가 가설되면서 그 기능을 거의 상실하고 맙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살곶이 다리는 꿋꿋하고 굳세게 아직도 의연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럽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서울시 지도(1966년 서울 PR사 간행)

한강을 따라 오른쪽 부터 잠실섬과 부리도, 마늘모양으로 둘로 갈라진 저자도, 이촌동 모래사장이 보이고 여의도와 밤섬이 확연하다. 제법 규모가 있는 난지도와 그 하류에 작은 하중도들이 뚜렷하다. <서울역사아카이브>

 

 

 

저자도

 

저자도는 중랑천과 한강이 만나 삼각주를 이루는 곳인 한강에 있던 섬입니다. 섬 이름에서 닥나무가 무척 많았던 섬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무척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했다 합니다. 동쪽은 토지가 비옥해 목축이 적당했고, 가운데 높은 언덕에는 낙천정을 지을 만큼 풍경이 뛰어난 곳이었다 합니다. 세종은 상왕인 이방원에게 수시로 문안을 다녔고, 아버지가 죽고 나서도 낙천정에 들러 휴식을 취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자주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저자도의 운명은 참으로 기구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원선 철도(용산∼의정부 간) 노반 겸 한강제방 4.5km(서빙고∼한남∼옥수∼금호동)를 만들면서 섬 일부를 헐어낸 것으로 추정되며, 을축(1925)년 대홍수 때는 섬 일부가 유실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1930년대까지 동서로 2km, 남북으로 0.885km, 면적 118만㎡(약 35.4만 평)에 이르는 비교적 규모가 있는 섬이었다 합니다.

 

일제는 1936년 뚝섬제방과 유실된 경원선 노반을 보강하면서 섬 일부를 다시 헐어내었는데, 그래도 낮은 구릉지 곳곳에 관목 숲이 우거지고, 사방이 드넓은 금빛 모래사장과 맑은 강물이 감싸고도는 아름다운 섬이어서 매년 여름철이면 더위를 피해 피서객들이 섬을 가득 메우곤 했다고 합니다. 

 

1969년 2월에 '압구정 공유수면매립허가'를 따낸 현대건설이 섬의 흙과 모래를 퍼내가면서 저자도는 형체가 사라지는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한강의 하중도가 큰 시련을 겪게 되는데, 밤섬과 저자도가 사라졌으며, 잠실섬과 부리도는 강제로 육지가 되어 버렸고, 난지도는 쓰레기 매립장으로 변해 버립니다.

 

저자도를 그대로 두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본디 삼각주로 형성되었던 섬이 물 흐름과 자체 회복력으로 옛 모습을 그대로 되찾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사라졌던 밤섬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섬을 헐어내 압구정동에 제방을 쌓고 택지를 조성하여 1972년 당초 허가면적보다 20% 상회하는 택지를 압구정동에 만들어 내지만, 한강 물 흐름을 방해한다는 지적에 제방을 안쪽으로 62m나 후퇴시켜 다시 쌓는 촌극이 빚어지기도 하였습니다.  그 땅에 1977년까지 총 5909 가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를 지어서 현대건설은 집 장사로 큰 이익을 보고 고위층에게 특혜분양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자도를 헐어내 압구정동의 확장 매립이 완료되자 섬 토지소유주들이 현대건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10여 년(1974∼1984) 간 다툼을 벌였으나, 엉뚱하게도 섬이 '국가하천에 속한 토지인가?' 여부로 재판 결과가 판가름 나버리고 맙니다.

 

어떤 이는 저자도가 1969년 이전부터 모래톱만 남은 사실상 모래사장이라 주장하기도 했지만, 1966년(서울 PR사)이나 1968년(인창서관) 발행된 서울시 지도를 보면 이 주장이 틀린 사실임을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대건설이 흙과 모래를 퍼내갔어도 그나마 모래톱만이라도 남아있던 섬은 전두환 정권이 88 올림픽을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시행한 '한강종합개발사업(1982∼1986)' 이후 저자도는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이때부터 한강은 규격화되어 기능이 제거된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게 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