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발효주로서 물 등으로 희석하여 6도 전후로 해서 만들어 먹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막걸리의 역사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오래되어서 곡물, 과일 등을 발효시켜 얻었던 막걸리의 관한 기록은 오래 전 부터 있어 왔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15년(1433년) 10월의 기록에 보면 "술에 대한 폐해와 훈계를 담은 내용의 글을 주자소에서 인쇄하여 반포하게 하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종 15년이면 조선 건국 초기로서 국가 재정의 중요성이 큰 시기로서 막걸리의 기본 재료인 곡식은 그 당시로서는 기본적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 귀중한 재물인데, 이것으로 막걸리를 빚으니 크나큰 낭비가 아닐 수 없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술을 마시지 말라" 라는 훈계의 내용을 홍보했었던 것입니다.
막걸리는 한자로 료(醪 ; 막걸리료)라고 불리었는데, 좋은 막걸리는 순료(醇醪)라 불리었습니다. 여기서 순(醇)자는 진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막걸리를 만드는 방법은 누룩(효모)을 미지근한 물에 풀어서 고두밥과 섞어 수분을 적당하게 하여 옹기 등에 담아두어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술이 고이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서 술이 발효를 하면서 이산화탄소 거품이 일어나게 됩니다. 여기서 발생하는 액체는 막걸리가 되고 나머지 찌꺼기 고형물은 술지게미라고 합니다.
막걸리는 막 걸러서 먹는 술이란 뜻과 빛깔이 희다고 해서 백주(白酒)로 불리기도 하며, 또한 집마다 담그는 술이라 해서 가주(家酒), 농가해서 필수적인 술이라 해서 농주(農酒) 등으로 불리었는데, 막걸리를 다시한번 정리해서 표현하면 막걸리는 정제되지 않은 술이라는 뜻이며, 이러한 막걸리를 한 번 더 걸러서 더 증류를 하면 증류주, 즉, 전통소주(燒酒)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이러한 전통소주는 극도로 귀한 술이기에 일반 백성들은 마시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걸리는 같은 날에 같은 사람이 같은 재료와 같은 방식으로 담가도 독마다 술맛이 다르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전에 담갔던 술과 그 다음에 담갔던 술맛과 색깔이 다른 것은 당연한 것인데, 그래서 집집마다 담그는 막걸리의 맛이 다르고 이런 부분에서 막걸리는 술의 불확실성 혹은 개방성을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막걸리도 일정 기간동안 숙성을 시키면 막걸리 맛이 정제되고 순화된다고 합니다. 이른바 제대로 익힌 술인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물을 섞지 않으면 무회주(無灰酒), 순료(醇醪)가 되고, 물을 섞으면 박주(薄酒), 엷은 술이 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은 특별하게 순료(醇醪)만 좋아했던 것이 아니라 박주(薄酒)나 험한 술도 구분없이 모두 선호하며 마셨는데, 막걸리라는 특성은 담글 때마다 달라지고 또 물을 섞어도 혹은 섞지 않아도 모두 마실 만한 술로서의 막걸리 매력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조선 중기의 문필가 한석봉(1543~1605)
짚방석 내지(내놓지) 마라. 낙엽엔들 못 앉으랴.
솔 불(초롱불) 혀(켜)지 마라. 어제 진(저문)달 돋아(떠) 온다.
아희야. 박주산채(薄酒山菜)일 망정(마저) 없다 말고(하지말고) 내어라.
조선시대 문신 조임도(1585~1664)
세상사람들은 (무릉)도원이 좋다지만
세상사 잊을 만한 도원은 만나지 못했네
산촌 막걸리(산료; 山醪)에 취해 세상사 잊을 수만 있다면
사람 사는 곳 어딘들 도원이 아니랴?
농암 김창협(1651~1708)의 시
시골 막걸리(촌료; 村醪)사오니 병마개는 풀 뭉치
해 저문 청산에서 이별 술을 따르네
그대도 봄 강 경치 좋아함을 알겠으니
미수(渼水; 물놀이)가 정자에서 다시 만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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