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암사 옛터 (檜巖寺址)
회암사의 창건 시점은 명확하지 않으나, 원증국사탑비(圓證國師塔碑) 중에 회암사라는 사찰명이 사용되고 있었고,『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권2에 1174년(명종 4)에 금나라 사신이 회암사를 다녀갔다는 기록을 볼 때 적어도 12세기 후반경에는 이미 사찰이 창건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회암사는 현재의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14 회암사지에서 보듯이 대규모의 사찰로 중창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고려 말에 인도의 고승인 지공선사가 ‘회암사의 산수 형세가 천축국(天竺國)[현재의 인도]의 나란타사(那爛陀寺)와 흡사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불법을 펼치면 크게 흥할 것’이라 하여 지공의 제자인 나옹이 그러한 뜻을 따라서 대대적인 중창 불사(重創佛事)를 행하였다.
회암사지는 천보산을 뒤로 하고 저 멀리 삼각산(三角山)을 앞에 두고 임진강(臨津江)과 한강(漢江)이 남북으로 갈리는 정점에 위치하고 있어 지공선사의 뜻인‘삼산양수지기(三山良水之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인해 고려 말 조선 초에 국찰로서 국가의 비호를 받으며 인도 나란타사와 그 규모나 위상을 견주어 중창을 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삼산양수간(三山兩水間 ) 지형
그런데, 조선 왕조가 건국할 때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정치 이념으로 하여 정책을 펼쳤으나, 한편에선 태조는 왕조 창업에 공헌한 불교 세력에 대한 배려가 컸으며, 특히 무학을 왕사(王師)로 임명하고 그가 주지로 있던 회암사에서 왕사 접견을 이유로 1393년부터 1398년까지 네 차례의 공식적인 행차를 가졌으며, 회암사에서 숙식(宿食)하기도 했는데, 상왕(上王)으로 퇴위하고 난 후에도 회암사에서 거처하면서 수도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회암사는 이와 같이 왕실의 공적인 행차가 빈번하게 이루어지면서 일종의 별궁(別宮)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태조가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회암사는 효령대군(孝寧大君)[태종의 둘째 아들], 정희왕후(貞熹王后), 문정왕후(文定王后)를 비롯한 많은 왕실 가족들의 불사(佛事) 후원이 지속되면서 중수와 중창을 거듭한 결과 조선 최대의 사찰로 완성되어 1424년에는 회암사는 토지가 500결에 달하고 승려 250여 명이 머무는 조선 최대의 사찰로 입지를 확고히 굳혔다한다.
특히 효령대군은 회암사 중수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에 세종은 신하들의 불사 금지조치 요구 등 회암사에 대한 배척을 묵살하고 이듬해 회암사에 쌀을 하사하는 등 불교의 중흥을 묵인하였다. 또한 1443년(세종 25)의 가뭄에는 회암사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도록 요청하였으며, 1446년(세종 28)에는 회암사 소속 승려들의 잡역(雜役)을 면제시키기도 하는 등 세종은 효령대군의 회암사 불사를 직 간접적으로 지원하였다.
1472년(성종 3)에는 세조 비인 정희왕후의 명에 의해 정현조(鄭顯祖)가 13개월에 걸쳐 회암사를 중창하였다. 또한 명종이 즉위하자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문정왕후는 회암사와 선왕(先王)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유생들이 절에 들어가 난동 부리는 것을 금지하고,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하는 등 불교 중흥 정책을 펼쳤다. 이 시기의 회암사는 국왕과 왕비, 세자, 비빈(妃嬪) 등 왕실 가족들의 기신(祈晨)이나 건강이 악화되면 기원하는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修禪道場)이 되었고, 국왕의 칠재(七齋)를 지냈으며 왕릉(王陵)의 제사도 모시는 등 왕실의 비호 속에 날로 사세(寺勢)가 커져 갔다.
그러나 1565년(명종 20)에 문정왕후는 회암사에서 대규모의 무차 대회(無遮大會)[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차별 없이 평등하게 잔치를 베풀고 물품을 골고루 나누어 주면서 집행하는 법회]를 계획하던 중에 무차 대회 직전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결국 문정왕후의 비호를 받던 회암사는 숭유 억불 정책의 조선 사회에서의 대표적인 표적이 되어 탄압과 비난으로 급격하게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 이후로 회암사는 폐사(廢寺)가 되었지만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폐사가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고, 다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선조 28년[1595] 조(條)에 회암사를‘옛터’로 기록하고 있어서, 명종 대에 유생들에 의해 방화가 되었거나 임진왜란 중에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나옹이 회암사를 중창한 14세기 후반부터 문정왕후가 불사를 후원했던 16세기 중반까지 약 200년 동안의 최대 사찰의 위상과 권위는 이즈음에서 일단락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회암
사지
발굴면적만 1만 여 평이고 큰 절에는 암자나 부속시설이 포함되기 마련이니
옛터에서 눈에 들어 오는 것은 모두 회암사 경내(境內)라고 해도 될 것 같다.
회암사 옛터와 경복궁 비교
위 사진은 안내 팸플릿 사진으로 회암사의 가람배치는 여느 절과 다르다.
산속에 있는 절은 불당이 산세에 따라 이리 저리 꺾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회암사는 일자로 늘어서 있다.
경복궁 구글지도.
경복궁 정도가 되어야 이런 일자배치가 나오고
창덕궁(昌德宮)을 비롯한 다른 궁궐들은 모두 기역 니은으로 꺾여있다.
익산 미륵사도 평지이긴 하나 배치는 3탑 3금당제로 절 3개를
나란히 붙인 꼴로 회암사의 배치와는 다르다.
회암사(檜巖寺)의 위치
대동여지도 양주(楊州)부분
회암사(檜巖寺)는 양주의 동북쪽 방향인 천보산(天寶山) 자락에 있다.
회암사에서 7시 방향에 도봉(道峰)산과 삼각산(三角山)이 있는데,
옛날 지도를 보면 지금과 길이 별반 다른 것 같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천보산 밑에서 비스듬히 송우(松隅)로 가는 길은 지금 56번 도로이고,
송우(松隅)-포천(抱川) 길은 43번 도로, 양주(楊州)와 불곡산(佛谷山)
동에서 북으로 뻗은 길은 동두천-전곡-연천으로 이어지는 3번국도이다.
회암사(檜巖寺)는 언제 어떻게 사라졌을까?
1566년 명종 21년 4월 20일 실록(實錄)기사-임금의 전교
“… 중략(中略)
다만 금년 봄에 송도(松都)의 유생이 음사(淫祠)를 태워버린 뒤로
사방에서 그것을 본받아 유림(儒林)들이 한갓 혈기의 용맹을 부려
방자한 행동을 일삼고 있다. 소문을 들으니 여항(閭巷)에서 떠들썩하게
전파되기를, 혹은 회암사(檜巖寺)를 태우려고 한다 하며….
중략
대사성으로 하여금 관학 유생에게 알아 듣도록 타이르게 하라.”
이렇게 송도의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 후
그 뒷말이 전혀 없다가 임진왜란 때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1595년 선조 28년 6월 4일-실록기사
군기시가 아뢰었다.
“각종 화포를 주조할 일을 이미 계하 하셨습니다. 중략(中略)
회암사(檜菴寺) 옛터에 큰 종이 있는데 또한 불에 탔으나 전체는
건재하며 그 무게는 이 종보다 갑절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을 가져다 쓰면
별로 구애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훈련도감도 조총을 주조하는데 주철이
부족하니, 그 군인들과 힘을 합해 실어다가 화포에 소용될 것을 제외하고
수를 헤아려 도감에 나누어 쓰면 참으로 편리하겠습니다. …하략(下略)
1566년 송도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는 것을 말리는 전교가 있은 후
1595년 불탄 회암사 옛터 큰 종을 녹여 화포에 쓰자는 논의가 나오니
1566-1595년 사이에 절이 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위 기사에 ‘불에 탔으니’ 란 구절이 있고 최근 발굴조사에도 불탄
흔적이 역력하니 화재로 인하여 이 절이 없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출토되는 불상들 목이 모두 잘린 점과 그릇들이 한 군데 모여 부서진 점이
곧 자연마모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파괴된 흔적이 분명한 것으로 보여서
자연발화나 실화(失火)로 일어난 불이 아니라 방화(放火)란 점이 확실한 듯 하다.
누가 불을 질렀을까?
위 실록기사 중 송도유생들이 불 지르려 한다는 기사가 있으나
말만 했을 뿐 실제로 하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위 인용 명종대왕이
1566년 4월 20일 내린 전교에 붙은 사신왈(史臣曰)이 마음에 걸린다.
사신은 논한다.
제왕은 안팎의 분별을 엄격하게 하여 말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옛날의 제도이다. 외간에서 이런 말이 있었다 하더라도 구중 궁궐 깊은 곳에
날아들어 임금의 귀를 놀라게 하고 미혹되게 하기를 이와 같이 쉽사리
하였으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은가. 간사한 말이 임금의 마음을 의혹시킴
으로써 마침내는 왕의 말에 욕됨을 남겼으니 또한 애석한 일이다.
유생들을 왜 말리느냐 는 식이니 당시 사대부 전체가 회암사를 태우려는 데
공감하고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과연 송도출신들이 불을 질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유생(儒生)들이라는 점은 분명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회암사의 고승 - 지공, 나옹, 무학
양주 회암사지의 서북쪽 산자락에는 고려 말, 조선 초 불교계를 주도하였던 고승으로 추앙되는 지공과 나옹, 그리고 무학의 부도와 탑비(塔碑)가 있다. 이와 같이 당시 불교계를 주도하였던 고승들이 회암사에 주석하였다는 사실을 볼 때도 회암사가 당시 불교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위상을 알 수 있다. 흔히 삼화상(三和尙)으로 불리는 지공, 나옹, 무학의 사상과 저술은 그들의 문도(門徒)와 계승자를 통해서 당시 사회에 널리 전법되었으며, 이는 현재 조계종(曹溪宗)으로 법통이 이어지고 있다.
지공은 인도의 승려로 법명은 디야나바드라(Dhyanabhadra)이다. 인도의 동북 지방 갠지스강 유역에 위치한 마가다(Magadha)국의 왕자로 태어나서 8세 때 나란타사 율현(律賢)에게 출가하여 삼장의 교학과 계율 등을 광범위하게 익히고 19세에 졸업하였다. 지공은 동방(東方)의 교화를 목적으로 인도를 서쪽을 돌아 네팔과 시킴, 티베트를 거쳐 중국의 청해(靑海)와 서안(西安)을 거쳐 대도(大都)에 이르렀고, 다시 서남(西南) 방향으로 가서 사천(泗川), 운남(雲南)에 머물면서 교화하였다.
이후 지공은 동쪽으로 이동하다가 마지막으로 원의 수도인 대도로 북상하였다. 그리고 고려의 개경(開京)과 금강산(金剛山)으로 가서 황제를 축원하는 불사를 주관하고 회암사를 비롯한 우리나라 각 지역에서 불법을 전파하다가 다시 대도로 돌아가서 법원사(法源寺)에 머물렀다. 지공은 인도의 불교와 힌두교는 물론, 중국과 우리나라의 불교를 비롯하여 특수한 신앙과 풍습을 두루 익힌 최고의 고승(高僧)으로, 그의 법통을 이어받은 승려들은 고려 말, 조선 초 불교계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며 당시 불교의 정통성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였다.
지공의 대표적인 제자이면서 회암사 중창을 본격화했던 인물은 나옹이다. 나옹의 성은 아씨(牙氏)이며, 속명은 원혜(元惠), 휘는 혜근(慧勤)이다. 나옹과 강월헌(江月軒)은 호이고, 시호는 선각(先覺)이다. 그는 1340년(충혜왕 복위 1)에 회암사에서 수도하며 큰 깨달음을 얻었다. 1346년(충목왕 2) 나옹은 원나라에 도착하여 고려인이 세운 선종 계통 사찰인 법원사에서 지공에게 수학하였다. 나옹은 원에서 유학하면서 지공으로부터 무심선(無心禪)을 익혔으며, 중국의 강남 지역에서는 당시 중국 불교의 대세였던 임제종(臨濟宗)을 배웠다.
1355년(공민왕 4) 원 황제의 명으로 황실 사찰에서 개당법회(開堂法會)를 주재하게 되면서 그 명성이 드높아졌다. 15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고려로 귀국한 후에는 주요 사찰의 주지를 역임하고 1372년(공민왕 21)에는 왕사(王師)에 올랐다. 나옹은 스승인 지공에게 배운 새로운 불교 사상의 영향을 받아 철저한 불이(不二) 사상의 토대에서 선(禪)을 이해했고, 전통적인 간화선(看話禪)을 바탕으로 임제종의 선풍(禪風)을 도입하여 고려 말 침체된 불교계를 일신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나옹은 1372년에는 국왕의 후원 아래 대대적으로 회암사 중창 불사를 단행하다가, 왕명(王命)에 의해 밀양의 영원사(瑩原寺)로 가던 중 여주 신륵사(神勒寺)에서 입적하였다.
고려 말에 불교는 국가 재정을 낭비한다는 이유로 신진 사대부의 규탄의 대상이 되었고, 가장 막대한 경제력을 갖고 있던 회암사는 그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숭유 억불을 통치 이념으로 하는 조선에서도 무학이 주석하였던 회암사는 위상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무학은 삼기(三岐)[현재의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출신으로 속성은 박씨이고, 휘는 자초(自初), 당호(堂號)는 계월헌(溪月軒)이다. 1344년(충혜왕 복위 5) 18세에 출가하여, 혜명국사(慧明國師)에게 불법을 배우며 1346년 부도암에 머물면서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진주 길상사(吉祥寺), 묘향산 금강굴(金剛窟) 등에서 수도 생활을 하고, 1353년(공민왕 2) 원나라 연경(燕京)으로 가서 원나라로 와 있던 지공과 나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1356년 무학은 귀국하여 나옹의 법을 이어받았는데, 1376년(우왕 2) 나옹이 회암사에서 낙성회(落成會)를 열 때 수좌(首座)로 초청하였으나 사양하였다. 1392년 조선 개국 후 왕사가 되어 회암사에서 거처하였다. 이듬해 태조를 따라 계룡산과 한양을 오가며 지상(地像)을 보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는 데 도움을 주었다. 1397년(태조 6) 왕명으로 회암사 북쪽에 수탑(壽塔)을 세우고, 1402년(태종 2) 회암사 감주(監主)가 되었다가 이듬해 사직하고 금강산 금장암(金藏庵)에 머물다가 1405년(태종 5)에 입적하였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무학을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여 불사를 후원하고, 사원전(寺院田)을 하사하는 등 대대적인 경제적 지원을 하였다. 태조 이후에도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진 왕족들이 회암사를 비호(庇護)하였는데, 특히 세종 때 선교양종으로 불교 종파를 정리할 때에도 회암사는 선종의 본산(本山)으로 건재하였으며,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 조선 최대의 사찰로 그 위상이 높았기 때문에 고승들의 활동은 당시의 불교사적인 상황과 그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여주 신륵사 조사당에 있는 나옹, 지공, 무학대사의 초상화
보우(普雨)
회암사가 마지막으로 번창하는 것은 명종(明宗) 때 文定王后가 섭정 할 때다.
문정왕후는 불교에 깊은 관심이 있었고, 보우(普雨)에 대한 배려가 각별했다.
보우(普雨)는 조선조 성리학자 관점에서는 요승(妖僧)이지만
도첩제를 만드는 등 불교에 많은 공로를 세웠다.
그러나 문제는 문정왕후에 너무 의존을 했던 점이다.
성리학을 받드는 조선의 사대부와 유생들의 반발이 많아지기 시작했는데,
보우대사가 문정왕후의 신임을 받을수록 사대부와 유생들에게는
더욱 미움을 받게 되었다.
명종 20년(1565) 문정왕후가 회암사 무차대회(無遮大會 ;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차별 없이 평등하게 잔치를 베풀고 물품을 골고루 나누어 주면서 집행하는 법회)
를 계획하다 대회를 치르기 전에 갑자기 죽었는데,
대신들은 요승 보우가 혹세무민하고, 궁금(宮禁)을 어지럽혀 문정왕후가
탈 난 것으로 몰아세워 보우 및 회암사에 대한 탄핵이 몇 달 동안 이어졌다.
결국 보우대사는 청평사에 유배를 갔다가 후에는 제주도로 유배 가서
제주목사에게 맞아 죽는다.
제주목사에게 가두라고 했지 죽이라 하지 않았으니 오늘 날 용어로는
사법살인(司法殺人)이나 당시 사대부들은 참 잘했다고 다 칭찬을 했다 한다.
그 뒤 글 첫 머리에 쓴 것처럼 1566-1595년 사이 어느 날
절은 불 살라지고 매년 토사가 덮어 그야말로 맨땅이 되고 만다.
회암사지 1954년
발굴(發掘)
양주시 회암동 산 14 일대가 회암사 옛터라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나,
얼마 전 까지도 그저 논밭으로 형성되어 큰 절이 그 아래 묻혀 있는 줄은 아무도 몰랐다.
1960년대 사적 128호로 지정되면서 조사가 몇 차례 있었으나 부분적이라서
전모를 짐작할 수 없다가 1997년 경기도 박물관의 시굴조사(試掘調査)로
비로소 옛 회암사의 규모와 가람배치(伽藍配置)의 대략을 알게 되었다.
이어 1998년부터 최근까지 사역(寺域)을 8개로 구획하여 정밀조사를 하여
드러난 대가람의 건물터와 쏟아져 나온 수많은 유물로 그 옛날의 영화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보광전(普光殿)
보광전
불당이름이 대웅전(大雄殿)이면 세상을 구한 위대한 인물-대웅(大雄)
곧 석가모니불을 모셨다는 뜻이다.
적광전(寂光殿) 광명전(光明殿) 보광전(普光殿)등 빛 광(光)자가 들어가면
온 우주를 진리의 빛으로 두루 밝히는 부처님 비로자나불을 모신 불당이다.
회암사는 비로자나불을 모셨던 모양이다.
박석(薄石)
보광전 앞. 박석(薄石)이 깔려 있다.
박석이 아무데나 깔린 것이 아니니 이로써도 회암사가 보통 절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극무늬
태극무늬-보광전 앞 월대
태극무늬에서도 회암사의 행궁(行宮)적 성격이 드러난다.
비단 보광전 뿐 아니라 지금 남아 있는 회암사 옛터 불당들 앞 월대에는 태극무늬가 새겨져 있다.
정료대(庭燎臺)
정료대란 긴 돌기둥과 사각형 상석위에 통을 올려놓고 송진으로 불을 밝히는 조명대이다.
정료대
회암사 옛터에는 이런 정료대가 곳곳에 있다.
임금이 머물던 곳
사진의 중앙 부분은 역대 임금 특히 태조대왕이나 문정왕후가
회암사를 찾았을 때 머물던 곳으로 추정한다.
청기와
옛날 청색을 내자면 회회청(回回靑)이 필요했는데 ‘회(回)’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중동에서 들여 온 것으로 바로 코발트다.
코발트가 없으면 청색을 낼 길이 없으니 조선조에서 청화백자 대신 철화를
만들던 시기는 중국과 서역길이 막혀 회회청 수입이 불가능 할 때다.
당연히 매우 비쌌으니 청기와란 그야말로 금을 바른 것이나 마찬가지로
궁궐에서도 청기와가 남아 있기는 창덕궁 선정전(宣政殿)이 유일할 정도다.
이런 청기와가 위 8단지 중앙 부분 주변에서 다량 출토되었다.
이는 바로 그 부분이 태조대왕이나 문정왕후가 머물던 곳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회암사의 행궁적 성격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배수시설
배수구
작은 폭포를 이루며 배수로를 따라 흘러내리다가, 집수구로 모아져
지하로 스며들도록 설계되어 있다.
돌유적과 수로.
비닐하우스 안 유적-아래에는 물이 흐르고 위는 온돌 시설을 했다고 한다.
맷돌
사진 중 네모난 돌 물통 바로 위 둥근 것이 맷돌로 지름이 1.8m 다.
한 번에 2-3천명 분 공양을 할 때도 있어 이런 맷돌이 2개 있다고 한다.
당간지주(幢竿支柱)
당간지주 크기가 이 정도면 회암사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가를 가름할 수 있을 것 같다.
구들
회암사 구들이 유명했던 모양으로 한번 불을 때면 49일이 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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