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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역사이야기 - 순화궁 고개

by 우둥불 2017. 12. 17.

 

 

남양주시 별내면 지역에서 순화궁 고개, 순화궁이라고 부르는 지명은 명확하게 남겨진 사료나 연관 지을만한 흔적은 전혀 없는데,  다만, 순화궁이라고 부르는 인근 지역에 조선 왕조 제14대 선조의 후궁인 순빈 김씨((順嬪 金氏)와 그의 소생인 순화군 이보(順和君 李珹,? ~ 1607년)의 묘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별내 신도시에서 북쪽 지역 다시 말해서 노원구 상계동 당고개역으로 가는 길에서 덕릉터널을 가기 전에 우측으로 청학리로 넘어가는 길을 따라가면 2차선의 도로로 길게 뻗어 올라가는 순화궁 고개가 나오며,  순화군의 묘는 그 고개를 넘어가기 전에 왼쪽으로 수락산이고 오른쪽 산(일명 : 국사봉 350m) 쪽으로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순화궁, 순화궁 고개라고 부르는 것은 아마도 순화군이 와전되어서 부르는 것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말한다면 순화군, 순화군 고개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추정해 봅니다.

 

 

순화군의 행각

 

순화군은 선조와 후궁 순빈 김씨(順嬪金氏) 사이에서 태어난 6남으로 본명은 이보(李?)입니다. 

 

순화군은 어린 시절부터 상당히 잔혹한 성품이었는데, 선조는 순화군이 어려서부터 동물을 잔인하게 학대하거나 죽였다고 회상합니다. 현대의 연쇄살인범들을 분석한 자료들을 보면 항상 어렸을 적 동물학대가 빠지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400년 전 순화군의 행동이 천성적인 사이코패스에 가까운 인물이었던  것이 정확히 들어맞는 듯 조심스레 추정해 봅니다. 

 

순화군이 13살 때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원도에서 의병운동을 지원하라는 선조의 지시를 받았으나, 강원도는 이미 함락되어 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함경도로 가서 미리 파견되어 있던 형 임해군을 만나 함께 회령에 주둔하였는데, 자신이 왕자임을 내세워 함경도민에게 행패를 부렸다고 합니다.

 

순화군이 황해도 신계(新溪)에 머물 때는 10대 중반의 미성년자였던 순화군이 신계 주민들에게 트집을 잡아 하루에 여러 명씩 형장을 때릴 정도로 잔학해서 이이첨의 건의로 삭탈관직을 당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이들 두 왕자에게 반발하여 국경인과 국세필이 왜군의 장수 가토 기요마사와 내통해서 임해군과 함께 순화군을 왜군에게 넘겨버렸습니다. 이후 약 1년 넘게 포로생활을 겪고 풀려났는데, 포로생활이 막장이던 이들의 성격이 완전히 더 개막장으로 만들어 버렸지 않나 추정을 해봅니다. 

 

순화군이 10대 후반이었던 전쟁 말기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인을 하여 확인된 피해자만 여러 명(대략 40여 명) 일 정도로 완벽한 연쇄살인마였는데, 전쟁이 끝난 직후인 1598년 12월에 광해군의 아들 원손의 탄생을 축하하는 대사령으로 그동안 지은 악질 범죄를 면하게 되었지만, 그 후 4달도 지나지 않아 또 사람 하나를 때려죽이면서 오늘날의 유영철을 능가하는 최악의 연쇄살인마가 되어 있는 듯 추정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막장 쓰레기였던 임해군이 형이랍시고 순화군의 행실을 꾸중하자 순화군은 "전 남을 때리기만 하지만, 형님은 집과 전답까지 빼앗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순화군이 임해군에게 한 변명은 이렇게 해석해 볼 수도 있다. 임해군의 약탈 짓은 주로 그럴듯한 집과 전답을 가진 부유층에 집중되었지만, 순화군의 강간, 폭행, 살인 등의 범죄 행각들은 주로 가난하고 힘없는 하인, 평민, 천민들에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임해군이 권력형 부정축재자라면, 순화군은 사이코패스에 연쇄살인마 정도의 차이가 있으니까 자기가 그나마 더 나쁘지는 않다고 발언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임해군이 강간, 폭행, 살인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사람을 죽여놓고도 선조의 자식에 대한 애착 어린 두둔으로 인해 처벌할 사람이 없어 임해군과 같이 막 나가고 있던 순화군은 마침내 궁궐에서 한 궁녀를 겁탈하는 패륜을 저지르게 됩니다. 당시 상황은 선조 33년 6월 27일 선조의 첫 번째 중전인 의인왕후 박씨가 죽어 장례를 치르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던 7월 16일 순화군은 과거 의인왕후를 모시던 궁녀를 대낮에 의인왕후의 관이 모셔져 있던 빈전 옆 여막에서 강제로 붙잡아 겁탈을 했습니다. 순화군이 사람을 죽여도 눈 감고 봐주던 선조도 이것만은 참을 수 없어 비망기로 순화군의 처벌을 지시합니다. 

 

이후 왕명에 따라 종부시(왕족을 처벌하는 기관)에서 순화군의 처벌을 보고했는데, 당시 법률에 따르면 강간범 순화군은 사형이었습니다. 그나마 종부시도 왕자를 사형시키기는 곤란했는지 화간(불륜)으로 슬쩍 말을 바꾸는데, 이것도 곤장 80대 이상에 유배형이었는데, 곤장 80대는 그냥 맞아 죽는 수준이었습니다. 이 보고를 받은 선조는 바로 순화군을 경기도 수원으로 유배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짓습니다. 

 

순화군은 궁궐의 골칫덩이가 되어 경기도 수원으로 유배되었지만, 왕도 포기한 망나니 왕자는 수원에서도 왕자임을 내세워 위세를 부린 탓에 수원부사 따위가 단속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형구를 마음대로 꺼내가서 하인들에게 멋대로 형벌을 가하도록 해서 향리들이 죽을 지경으로 맞았으며, 관리들이 순화군을 피해 도망친 탓에 수원부의 행정업무가 완전히 마비되고, 심지어 부사마저 도망갔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단순히 유배시켜 놓는 걸로만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결국 가택연금을 지시했습니다. 하지만 금부도사가 담장을 쌓을 때도 사람을 두들겨 패고 문을 잠그자 자기 손으로 직접 열고 나오는 등 여전히 제멋대로 굴었습니다. 

 

수원부사 권경우(權慶佑)가 새로 부임해 왔을 때, 부임하는 날 순화군에게 먼저 인사를 하지 않고 출관부터 하자 부사 권경우에게 긴 칼을 차고 말을 타고 달려와서는 기둥을 칼로 치면서 '부사(府使) 몸에서는 피가 나오지 않는다더냐'고 협박을 하고 그 다음에는 하인에게 도장을 찍은 봉지 하나를 가져가게 했는데 그 안에는 먹으로 사람 머리를 그려놓고 '부사 권경우의 잘린 머리통이다'라고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권경우는 겁을 먹은 나머지 부의 업무들을 보지 못해서 결국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수원부사는 박이장(朴而章)으로 교체되었으나, 여전히 순화군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순화군의 집 궁문을 봉쇄해 버렸으나 담장을 헐고 밖을 나다니면서 백성들에게 온갖 행패를 부렸고, 채소가 신선하지 않다면서 채소밭을 맡고 있는 노(奴) 임동(林同)의 숙모를 잡아다가 직접 몽둥이로 20여 차례 두들겨 팼으며, 읍내에 사는 김영수(金永水)가 궁에 상직하러 나갔을 때 잡아다 들여서 두들겨 패고 옷을 불태우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소고기와 생선을 올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창고지기 노비 어리손(於里孫)의 가옥을 불태워 없애기도 했고, 화공(畫工) 정업수(鄭業水)를 잡아다가 40차례 직접 몽둥이로 두들겨 패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약주를 가지고 간 원금(元金)이라는 사람을 무수히 구타하거나 역시 약주를 가지고 온 계집종 주질재(注叱介)를 옷을 전부 벗겨 결박하고 날이 샐 때까지 풀어주지 않기도 했습니다. 

 

군사 장석을시(張石乙屎)는 집에 질병이 돌아 맹인 윤화(允化)의 아내 맹무녀(盲巫女)를 데려다가 역신(疫神)을 쫓는 굿을 하고 있었는데, 순화군이 이들을 잡아가서는 한 차례 형문을 한 뒤에 밤새도록 붙잡아 두었습니다. 그리고 맹무녀의 위아래 이빨을 1개씩, 장석을시의 위아래 이빨을 9개씩 쇠뭉치로 때려서 깨부수고 집게로 잡아 빼버렸다. 무녀는 궁 안에서 숨을 거두었으며, 장석을시는 이튿날 풀려났지만 죽을 정도의 부상을 당하여 결국 사망하였습니다. 

 

결국 수원 사람들이 순화군을 피해 앞다투어 고을을 떠나 도망쳐서 어쩔 수 없이 순화군을 다시 서울로 불러들여 가택연금을 해두었습니다만, 여전히 담을 허물고 나가 사람을 붙잡아다가 곤장을 치는 등 개망나니 짓을 벌리는 것이 예사였다고 합니다. 이즈음에 임해군과 순화군의 악명이 하도 높아서 이들을 사칭하면서 소란을 피우는 놈들까지도 다 나왔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사헌부를 비롯해서 순화군을 잡아 죽이라는 상소가 빗발쳤으나, 선조는 아들 순화군의 이런 행각을 안타까워하며 계속 두둔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순화군의 성격이 워낙 흉포하여 고쳐질 생각이 없자 손을 쓸 수 없게 된 선조는 결국 군호를 폐하고 서인으로 강등시켜 버립니다. 

 

서울에 잡혀와서도 훈련도감 소속의 포수와 무뢰배를 모아서 자기 집에 머물게 하고, 그들을 몰아 사람을 붙잡아서 두들겨 패고 죽이는 사건을 일으키곤 했습니다.

 

 

사관의 주석 :

 

"순화군 이보가 위리(圍籬)에서 벗어난 뒤부터 더욱 흉학(凶虐)한 짓을 마구하여 거리를 드나들면서 사람을 만나면 번번이 죽였었는데, 이날에도 두 여인을 죽여 참혹한 독기를 뿌린 것이 극도에 달하였으므로 조야(朝野)가 진동하여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이때 임금은 바야흐로 왕자(王子)들을 비호하기만 하여 감히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만 중한 배척을 가하였으므로 대관도 감히 논계하지 못하고 재상들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출처:선조실록 37년 5월 25일 기사)

 


아무튼 순화군은 아버지 선조가 범죄를 감싸주니 상태가 더 심해져 급기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집을 뛰쳐나와 길거리를 쏘다니며 사람을 죽이고 곤장을 치길 밥 먹듯이 했습니다. 순화군이 온다는 말만 들어도 사람들이 도망치고 숨고, 순화군 밑의 무리들은 이 틈을 타서 도적질을 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잡아 가두려 했는데, 문 앞에 앉아서 닫지를 못하게 시위를 벌이고 폐문 공사를 담당한 감독관에게 죽이겠다고 협박해 댔습니다.

 

 

당시의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순화군(順和君) (李?)를 안치(安置)시킨 곳의 수리가 끝났으므로 봉쇄하려는데 보가 문에 버티고 앉아서 봉쇄하지 못하게 합니다. 반복하여 타일러도 끝내 듣지 않으니 본부에서 처치할 수가 없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선조가) '알았다'고만 전교를 하였다. 

 

사관은 이같이 논한다. "임금도 이를 억제하지 못하니 다른 사람이야 어찌 논할 수 있겠는가. 하나의 왕자(王子)를 죽이는 것은 진실로 차마 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백성은 무슨 죄인가. "(출처: 선조실록 177권 37년 8월 7일 기사)

 

 

결국 선조도 더는 참아줄 수가 없어, 금위군 무사들을 보내서 붙잡아 단단히 가택 연금했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단단히 갇혔는지, 몇 년 간은 별다른 사건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지내다가 풍(風)을 맞아 쓰러져 움직일 수 없게 되어 행패를 부리지 못하게 되었다가 마침내 죽음으로서 이 짓거리들도 끝을 맺습니다. 

 

1607년에 28세로 요절을 하였으며, 순화군은 그의 사후에 복권되었지만 후사가 없어서 익성군(益城君)의 아들 진릉군(晉陵君) 이태경(李泰慶)이 후사가 되었고, 이계여(李桂餘)라는 딸이 있었다고 하는데, 순화군의 부인은 인조 때까지 살아 있었으며, 정조 때 희민(僖敏)이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선조실록의 순화군 졸기(卒記)에 기록된 다음 문장이 그의 생애를 한마디로 압축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록 임해군과 정원군의 행패보다는 덜했음에도, 무고한 사람을 죽인 숫자가 해마다 10여 명을 헤아리기에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호환을 피하듯 했다". 

 

그런데 임해군과 정원군의 범죄는 살인과 강간도 저지르긴 했지만, 주로 폭행이나 협박을 통한 재산 강탈이며, 또한 피해자들이 주로 양반층이었기 때문에 후에 그들의 악행을 전 할 사람이 많았지만, 순화군은 주로 하층민의 피해자들이 많았고, 또한 대부분이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순화군의 악행을 전 할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어 순화군의 악행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임진왜란과 순화군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아들 7명 중에서 2명은 어린아이였습니다. 여기서 세자 광해군을 제외한다면 4명의 왕자들을 모두 지방으로 파견해서 임진왜란에 필요한 의병을 모집할 수 있었는데, 선조는 성질이 안 좋은 임해군과 순화군 둘만 함경도와 강원도로 가게 했고, 세자 광해군과 성년이 된 신성군과 정원군은 자신을 수행하며 피난길에 같이 했습니다. 

 

임해군은 선조의 큰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성질이 포악하고 부도덕하여 의부 동생인 광해군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겼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광해군과 임해군 두 형제를 함께 데리고 파천을 한다면 그들 사이에 알력이 커질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두 형제를 떼어 임해군에게 의병을 모집하게 하여 선조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렸습니다. 

 

이것은 첫째는 두 형제의 알력을 최소화하는 것이고, 둘째는 형제간의 경쟁심을 이용해 의병 모집을 최대화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임해군은 21세로 명실상부한 성년이었지만, 동생인 순화군은 13세에 불과한 나이였습니다. 반면 선조를 수행하게 된 신성군은 15세였고 정원군은 13세였습니다. 세자 광해군은 18세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13세의 순화군이 15세의 신성군을 제치고 의병 모집에 나서게 된 이유는 선조의 신성군에 대한 편애 때문이었습니다. 

 

선조는 후궁 중에서 숙의 김씨를 가장 총애했습니다. 따라서 아들 중에서는 숙의 김씨 소생인 신성군이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선조가 임진왜란 때까지 세자 책봉을 미룬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신성군 때문이었습니다. 이전부터 선조는 신성군을 세자로 삼고 싶어 했지만, 왕비의 아들도 아니고 후궁 소생 중 첫째도 아니어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조는 조금 더 기다렸다가 신성군을 세자로 삼으려 했는데, 뜻밖에 임진왜란이 터지는 바람에 부득이 광해군을 세자로 삼게 되었던 것입니다. 

 

선조는 신성군으로 하여금 자신을 수행하게 함으로써 만약의 경우에 세자 광해군을 대신하게 할 생각이었습니다. 신성군의 친동생인 정원군 역시 숙의 김씨 소생이었기에 선조를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의병을 모집하게 된 임해군이나 순화군은 상대적으로 선조로서는 그들의 성품을 알기에 관심 밖에 있던 왕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함경도와 강원도에 왕자를 파견한 이유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파천 길에 오른 선조의 1차 목적지는 개성 아니면 평양이었습니다. 당연히 선조가 파천하게 될 황해도(개성)와 평안도(평양)에서 왕자들이 앞장서서 의병을 모집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반면 함경도와 강원도는 태조 이성계가 태어나 활약하던 곳으로 조선 왕실의 고향과도 같은 곳일 뿐만 아니라 조선의 최정예 병력으로 손꼽히는 6진의 기마대가 소재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4월 30일 새벽에 임해군은 창덕궁을 떠나 함경도로 향했습니다. 조금 앞서서 순화군도 강원도로 갔습니다.

 

5월 3일 강원도 금화에 도착한 임해군은 그곳에서 왜적이 이미 춘천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금화와 춘천은 하루 일정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 임해군은 빨리 북으로 길을 재촉해 5일에는 철령을 넘어 함경도의 안변에 도착했고, 이어 9일에는 원산 주변에 있는 덕원에 도착했습니다. 

 

임해군은 그곳으로 함경도 감사와 군사령관들을 소집했습니다. 이에 호응해 북청에 주둔하던 남병사 이혼이 4000명에 가까운 병력을 이끌고 왔습니다. 이 병력이 당시 조선 관군 중에서는 최정예 병력이었는데, 임해군은 그중에서 200명을 선발해 선조에게 보내고 나머지는 전쟁터로 가게 했습니다. 

 

남병사 이혼은 관군과 힘을 합쳐 경기 양주 해유령에서 왜적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70여 명의 왜적을 참수한 이 전투는 임진왜란 이후 육군이 얻은 최초의 승리였습니다. 이외에도 임해군은 함경도 주민들의 항전 의지를 고양시키기 위해 말을 무상으로 지급하고, 세금을 대폭 감면했습니다. 임해군의 의병 모집 활동에서 강제적 물자 수탈이나 불법적 노동력 징발 등 부작용을 일으키긴 했지만, 현실적인 성과도 어느 정도는 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5월 27일에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평양의 선조는 물론 덕원의 임해군 역시 위험한 상황에 빠져들었습니다. 선조는 명나라에 망명할 각오를 하고 의주로 갔고, 임해군은 마천령을 넘어 함경북도의 경성으로 퇴각했습니다. 그 당시 순화군은 강원도를 벗어나 임해군과 함께 있었습니다. 

 

임진강을 건넌 왜적은 황해도 평산에 이르러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로 각각 길을 나눠 침략했습니다. 함경도로 쳐들어간 왜장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였습니다. 황해도 곡산을 경유한 가토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함경도로 쳐들어갔습니다. 당시 남병사 이혼은 왜적의 침입로를 철령으로 예상하고 강원도 회양에 주둔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황해도 곡산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에 가토는 무인지경을 달리듯 함경도로 쳐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6월 17일, 가토는 안변에 도착했습니다. 가토는 병력을 나눠 일부는 안변에서 흡곡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게 했습니다. 반면 자신은 주력 부대를 거느리고 함흥으로 진출한 뒤 북청, 단천을 지나 계속 북진하면서 왕자들을 추격했습니다. 

 

북병사 한극함은 마천령에서 가토를 막으려 했으나 대패했고, 그 전투가 7월 18~19일 이틀간 전개된 함경북도 성진의 해정창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후 함경도의 행정조직과 군사조직은 일거에 와해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임해군과 순화군은 또다시 경성에서 회령으로 퇴각했다가 7월 23일에 회령 사람 국경인에게 포로로 잡혔습니다.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왕자들이 포로로 잡히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왜장 가등청정이 함경도로 침입하니 회령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두 왕자와 여러 재신을 잡아 적에게 항복했다. 이로써 함경남도와 북도가 모두 적에게 함락됐다. 당초 가등청정이 고개를 넘어 왕자 일행을 끝까지 추격하니 왕자가 경성으로 도망했다. 북병사 한극함이 마천령에서 항거해 싸웠으나 해정창이 왜군에 차단당하자 군사들이 패해 도망했다. 왕자가 진로를 바꿔 회령부로 들어갔는데 적병이 가까이 추격했다는 말을 듣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다.

 

회령의 토병(土兵)이 모반해서 성을 지키겠다고 거짓 청을 하면서 방문의 자물쇠를 간수하여 나가지 못하게 했다. 결국 국경인이라는 인물이 객사를 포위하고 두 왕자 및 부인·여종·노비 등과 재상 김귀영, 황정욱, 황혁과 그들의 가솔을 잡아 모두 결박하고 마치 기물을 쌓아놓듯 한 칸 방에 가뒀다.”[<선조수정실록> 25년(1592년 7월 1일)]

 

 

이에 앞선 6월 11일, 선조가 평양을 떠나 의주로 향하자 함경도에는 국왕이 나라를 버리고 명나라에 망명하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여기에 해정창 전투의 패배 소식이 더해지고, 또 임해군과 순화군의 회령 도피 소식이 더해지자 함경도 사람들은 왕자들 역시 명나라에 망명하려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실록에 의하면 회령에 들어간 임해군과 순화군은 왜적이 가까이 추적했다는 말을 듣고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라고 하는데 바로 이 행동이 의심을 불러왔습니다. 회령에서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는 것은 사실상 국경을 넘어 명나라로 들어가려 했다는 것인데 결국 망명하려 했다는 뜻이었습니다.

 

사실 해정창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임해군과 순화군이 회령을 향해 갈 때부터 망명할 의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함경도 사람들은 왕자들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꼈고, 그랬기에 왕자들이 지나갈 때마다 그 사실을 일일이 써 붙여 가토에게 알렸습니다. 이런 사실에서 보면 해정창에서 패배한 이후 선조는 물론 임해군과 순화군도 함경도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임해군과 순화군을 사로잡은 국경인은 이 사실을 가토에게 알렸습니다. 회령에 가토가 들어왔을 때 왕자 등은 밧줄로 꽁꽁 묶여 있었습니다. 가토는 “이 사람들은 바로 너희 국왕의 친아들과 조정 대신들인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곤욕을 주는가?”라며 결박을 풀게 했습니다. 이후 가토는 6진 지역을 모두 접수하고, 9월 초에 안변으로 철군했습니다. 포로가 된 임해군과 순화군 역시 안변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때 가토는 돗자리로 싼 가마를 만들어 왕자들을 옮겼는데,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밤이 되면 방문을 새끼로 얽어 묶었으며, 수많은 보초병을 세우고 밤새 불을 밝혔습니다. 

 

1393년 2월 20일, 명나라 사신 풍중영은 안변에서 가토와 만나 강화회담을 가졌습니다. 당시 임해군과 순화군은 일본으로 끌려갈까 봐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강화 회담이 한 달 넘게 이어지면서 명과 일본 사이에는 일종의 묵인이 형성됐는데, 즉 일본은 한양에서 자진 철수해 남해안 지역으로 물러가고, 그 대가로 명은 일본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묵인이었습니다. 4월 19일, 일본군은 한양에서 자진 철수해 남해안 지역으로 물러갔습니다. 그때 임해군과 순화군은 부산으로 끌려갔고, 이후 명군은 일본군을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공식화되지 않았을 뿐 명나라는 일본의 남해안 지역 점유를 묵인했고, 일본은 명나라 군대의 조선 주둔을 묵인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것은 영토 할양을 통한 화친이라는 가토의 협상안이 관철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같은 묵인의 증표로 임해군과 순화군이 명군에 송환됐습니다. 그때가 1393년 7월. 포로로 잡힌 지 1년 만이었습니다. 

 

선조의 입장에서 왕자들의 송환은 마냥 기쁜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조선을 조선으로 보전하기를 원한다면 선조는 영토 할양을 공인하거나 묵인하는 그 어떤 상황도 용납할 수 없음을 천명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자면 영토 할양 묵인의 증표로 송환된 두 왕자를 단호하게 거부하거나 처단해야 했습니다.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의지가 빈말이 아님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선조는 두 왕자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처단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대신 두 왕자를 수행했던 신료들만 가혹하게 처벌했습니다. 선조는 자신과 왕자들은 전쟁 책임을 조금도 지지 않을 것임을 공언한 셈이었습니다. 이런 선조가 명나라 장수들에게 왜군을 몰아내 달라 요구했을 때 얼마나 호소력이 있었을까요? 국력도 약하고 의지도 약한 왕의 투정 정도로 무시되지는 않았을까요.  

 

실제로 명나라는 선조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몇 년 동안이나 일본군을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자칫 왜군의 남해안 지역 점유가 수십 년 아니 수백 년 지속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랬다면 조선은 유명무실해질 수도 있었고, 이런 아슬아슬한 상황은 정유재란(1597, 선조 30)에서 조선이 승리함으로써 겨우 해소될 수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중 일본군의 남해안 지역 점유가 몇 년간이나 지속된 이유는 근본적으로 조선의 국력이 약해서였습니다. 그것에 더해 선조의 무책임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끝. 

 

임진왜란과 순화군 발체 : 신명호 -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 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