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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활동/이것저곳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과 무수상행식(無受想行識) 그리고 중도(中道)

by 우둥불 2016. 11. 30.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인간에 있어서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란 자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가 있는데, 이는 색온(), 수온(), 상온(), 행온(), 식온() 이라 하고 이를 오온(五蘊)이라 한다. 이렇듯 인간에게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 있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생기고 나를 둘러싼 고유의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 나타나므로써 안팎으로 경계와 한계가 생기게 된다.


색수상행식은 생멸과정을 알려주는 12연기법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 에서 보면 <무명(無明) -> 행(行) -> 식(識)>이 되는데, 인과를 품고 있는 정신체의 쌓인 움직임으로 생겨난 무의식적 감각기관으로서의 모습을 가진다. 이 과정에서 개인마다 다른 식(識)에 의해 지수화풍(地水火風)의 4대가 개개인별로 다른 구성비율을 가지고 모여 명색(名色)과 육입(六入)이 생기니 이는 곧 <안이비설신의>가 된다. 그러면서 <색수상행식>과 <안이비설신의>가 점차 한덩어리가 되어 <촉(觸) -> 수(受)>를 하는데, <애(愛) -> 취(取) -> 유(有)>로서 태어나(生) 늙음과 죽음(老死)을 겪는다.


여기서 인간의 똑같은 점은 무명(無明)과 생(生)과 노사(老死)밖에 없으니 인간으로서의 시작과 끝이 있다는 점만 동일하다. 나머지는 고유의 나 자신이다.


안이비설신의에서 의(意)가 붙어 있으니 몸과 감각기관이 색수상행식과 더불어 하나가 되어 주관으로 작용한다. 즉, 개개인마다 색성향미촉법을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게 되는 것이다. 이는 똑같은 것을 봐도 각각 다르게 보고 똑같은 소리를 들어도 각각 다르게 듣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에 따라 다른 생각과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부 색성향미촉법에 의한 스트레스를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가는 스스로 조정할 수 있는 법이다. 


색성향미촉법은 내 밖의 일체존재로서 영적(靈的), 기적(氣的), 물적(物的)환경을 총칭하는데, 색수상행식의 인과와 안이비설신의로 이루어진 내가 <촉(觸) -> 수(受) -> 애(愛) -> 취(取)>하므로 나타나는 유(有) 대상이다. 색성향미촉법은 본래 순수한 객관이지만 내 마음(욕망)에 의해 그만 주관으로 되어버린다. 그래서 공(空)이 사라지고 만다. 그러므로 당연히 색(色)으로 전락하여 나와 항상 부딪치며 갈등을 만들고 업(業)이 지어지게 된다. 여기서 나와 환경 등 일체가 상대성의 세계에 존재하게 되고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성주괴공(成住壞空)을 겪어 결국은 허망하게 된다.


그리고 색성향미촉법에 법(法)이 붙어 있으니 이것은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취하거나 뜻대로 무작정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우주의 법칙에 따라 개개인마다 다르게 주어지고 개별적인 작용을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환경은 색수상행식의 내용물에 따라 법에 의해 주어지고 안이비설신의가 주관대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풀어얘기하면 색수상행식 가운데 복을 지은 선한 마음은 대체로 편하고 풍요로운 환경을, 죄를 지은 악한 마음은 대체로 힘들고 빈약한 환경을 초래하게 된다. 이른바 자업자득인 것이다.


이렇게 법이 색수상행식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다. 뜻(意)과 법(法)의 괴리가 고통을 낳는 가운데 나의 정신(색수상행식)과 몸(안이비설신의)과 환경(색성향미촉법)이 하나로 뭉쳐 생각이 중심이 되어 나의 전체를 이끌며 삶이 전개되고 있다. 그런데 안이비설신의에만 매이면 오히려 자기 자신의 본체라 할 수 있는 색수상행식을 스스로 막아버리게 되니 단순한 동물로 전락하고 허무하게 된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므로 삶의 어떤 변화를 바란다면 일차적으로 생각을 바꾸어 뜻(意)과 마음을 바르게 갖추어야 된다는 전제조건이 무조건 붙는다. 무조건 최선만 다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정사(正思)가 관건인 것이다.


색수상행식을 근원으로 안이비설신의가 생겨 심신을 형성할 때 개개인마다 천차만별의 차별상이 생겨나고 동일한 모습은 없게 된다. 각 존재가 모든 우주에서 고유성을 갖는 것이다. 




무수상행식(無受想行識)



무수상행식(無受想行識)은 나의 개별적인 욕망인 뜻(意)이 소멸되어 색수상행식의 마음을 넘어선 진리체(眞理體)로서 움직임이 없는 부동(不動)의 모습이다.


무수상행식에 의해 가지는 몸인 무안이비설신의는 주관이 사라져 물질세계인 색성향미촉법뿐만 아니라 무색성향미촉법인 영적(靈的)모습과 영혼세계의 정보도 받아들이고 알게되는 영적 감각기관의 모습이다. 이때 뜻(意)은 비로서 무수상행식으로 부터 직접 나오니 곧 부처님의 자비와 예수님의 사랑이다.


이때 안이비설신의는 신통한 능력을 가진 반야(지혜)의 몸으로 화(化)하여 진리를 내보내게 되니 곧 부처의 화신(化身)으로서 드러난 몸과 방편이 된다. 그리고 일체대상인 색성향미촉법은 내 욕망충족의 대상이 아니라 오로지 순수하고 지극한 자비(慈悲)가 함께 하는 대상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무주상보시가 된다.


색성향미촉법이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확장되어 무색성향미촉법이 되니 비로서 법의 등불을 밝히게 되어 이른바 무법(無法)으로서 법등명(法燈明)이다. 그래서 나 자신이 갖고 있는 모습과 시간과 공간과 대상의 물리적 한계와 일체 욕망을 단번에 벗어나 자유롭게 된다.


색수상행식과 안이비설신의인 내 몸이 무수상행식과 무안이비설신의가 되어 비로서 나 자신의 등불이 밝아진 것이니 이른 바 무아(無我)로서 자등명(自燈明)이다. 이렇게 색수상행식과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은 본래 인(人)과 뜻(意), 그리고 법(法)이 모두 공(空)하므로 색(色)이 없어 그림자가 없이 온통 밝음뿐이다.


공(空)가운데 색(色)이 없으므로 이와 같아서 자연스럽게 무안계(無眼界)내지 무의식계(無意識界)가 된다. 무수상행식이 되어 무색성향미촉법까지 무안이비설신의에 환하게 비추어 온전하게 있는 그대로 전체를 순수한 객관으로 보고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안이비설신의 때문에 가지게 된 객관과 주관의 상대성과 경계도 소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순수해진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이 무심(無心)으로 청정해진 색수상행식과 합해지므로 일체동관(一體同觀)이된다. 육안과 천안, 혜안과 법안, 그리고 불안(佛眼)의 오안(五眼)이 하나가 되어 육안을 통해 나오는 것이다.


이때의 눈은 순수하므로 어느 눈으로 보나 차별이 없게 되어 대상이 나의 안목에 따라 주관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볼 수 없는 것이 없게 된다. 과학연구의 물리적 한계도 나로 인해 근본적으로 극복되는 것이다. 불이(不二)는 모든 힘을 통일적으로 통합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몸과 마음과 영혼과 대상 등의 일체가 불이(不二)이기 때문에 내가 따로 나오고 들어감이 없다. 항상 여여(如如)하지만 고정됨이 또한 없다.

 

본래 인간을 비롯한 일체생명은 온몸이 바로 뿌리로서 오로지 불이(不二)의 평등 밖에 없다. 이 실상을 깨달아가는 길이 곧 중도(中道)를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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