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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활동/이것저곳

의기(義妓) 논개의 진주성 탐방

by 우둥불 2022. 2. 21.

진주성 

 

진주성은 백제 때의 거열성(居列城)터였다고 전하여지지만, 진주성을 언제 쌓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사료에 의하면 고려 말인 우왕 3년(1377)에 왜구의 침입을 방어할 목적으로 성을 고쳐 쌓았으며, 임진왜란 때 호남으로 진출하려는 왜적을 철통같이 막아 낸 관문이었다고 합니다.

 

본성동과 남성동에 걸쳐 있는 진주성 안에는 의기사(義妓祠), 쌍충사적비(雙忠事蹟碑), 김시민장군전공비와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壇碑)가 나란히 서 있는 정충단(旌忠壇)과 함께 북장대(北將臺), 서장대(西將臺), 영남포정사문루(嶺南布政司門樓), 창렬사(彰烈祠), 호국사(護國寺) 등의 유적들이 있으며, 이 일대가 모두 사적으로 지정돼 있습니다.

 

진주성에서는 임진왜란 때 두 번에 걸쳐 큰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 가운데 1차 전투가 임진왜란 3 대첩의 하나로 손꼽히는 진주성 싸움입니다.

 

진주성문과 함께 그 안 마당에 식수로 사용하였던 우물터

 

진주성문의 측면 모습입니다.

 

진주성곽과 함께

 

진주성곽과 촉석루의 측면모습 그리고 남강의 대표적인 다리인 진주교

 

진주성곽을 따라 난 산책길

 

포루 - 진주성을 방어하던 포 진지입니다.

 

 

 

촉석루(矗石樓)

 

남강가 벼랑 위에 장엄하게 세워져 있는 촉석루는 진주성의 남장대(南將臺)로서 고려 고종 28년(1241년)에 진주목사 김지대(金之岱)가 창건한 후 몇 차례 불에 타서 여러 차례에 걸쳐 고쳐 지은 것으로, 남원 광한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큰 규모로써, 진주성 맞은편에서 보는 촉석루의 모습은 강과 한데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처럼 보입니다.

 

하륜의 '촉석루기'에 의하면 '촉석루'라는 이름은 강 가운데 돌이 우뚝 솟은 바위 위에 지은 까닭에 루(樓)의 이름을 촉석이라 했다고 전해지며, 촉석루의 또 다른 한편의 이름은 장원루(壯元樓)라고도 부릅니다. 

 

촉석루는 전시에는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였고, 평시에는 시인묵객들이 풍류를 즐기는 명소로서 이용되었고, 과거시험을 치르는 고사장으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본래는 국보 제276호였지만 1950년 한국전쟁으로 불에 타서 시민의 성금 등으로 1960년에 옛 모습으로 복원되었고, 2020년 현재에는 경남 유형문화재로 되어 있습니다.    

 

촉석루

 

촉석루 내부 인증샷

 

촉석루에서 바라본 남강일대

 

남장대(촉석루)라고 현판이 달린 모습

 

 

 

논개(論介)


논개(1573~1593)는 진주목의 관기(官妓 ; 관청에 딸려 가무와 기악 등을 하는 기생)로 임진왜란 중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이긴 왜군이 촉석루에서 자축연을 벌일 때 왜장을 남강가로 유인하여 끌어안고 강물에 빠져 순절한 의기(義妓)입니다.

구전으로 전해오던 논개의 순국 사실이 문자화 된 것은 1620년 무렵 유몽인(柳夢寅)이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채록하면서부터이며, 그녀가 순국한 바위에 ‘의암’(義岩)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은 것도 이 무렵의 일입니다.

 

2차 진주성 싸움으로 진주성이 함락되자 왜적들은 촉석루에서 자축연을 벌였습니다. 이때 관기였던 논개가 열 손가락에 깍지 낀 손가락이 미끄러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가락지를 끼고 왜장 '에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왜군에게 조선 여인의 기개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던 사건이었습니다.

 
촉석루 바로 앞 절벽 아래에 작은 섬처럼 떠 있는 바위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뛰어들었던 의암(義岩)입니다. 물 위로 솟은 높이와 너비가 각각 약 3m 정도의 바위로 조금씩 움직여서 촉석루 쪽 절벽에 들러붙기도 떨어지기도 한다는데, 절벽에 와닿으면 큰 재앙이 난다는 전설이 있기도 합니다. 본래는 위암(危岩)이라 하였지만, 논개의 충절을 기려서 바위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논개의 충절심은 더 이상 논할 바가 없었는데도 일부 보수적인 사대부들은 편견을 내세워 임진왜란 중의 충신·효자·열녀를 뽑아 편찬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논개의 이름을 올리지 않았습니다만, 그러나 진주 사람들은 성이 함락된 날이면 강변에 제단을 차려 그의 의혼을 위로하는 한편, 국가적인 추모제전이 거행될 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하였습니다.

결국 의기(義妓) 논개가 공식적인 호칭이 된 때는 경종 1년(1721)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이 논개에 대한 국가의 포상을 비변사에 건의하여 그의 순국 사실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 이후입니다. 이후 영조 16년(1740)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의 노력으로 논개의 혼을 기리는 의기사(義妓祠)가 의암 부근에 처음 세워지고, 매년 논개 추모제가 성대히 치러지게 되었습니다.

논개의 고향으로 알려진 곳은 남덕유산 남쪽으로 육십령 부근의 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의 주촌(朱村)마을입니다. 이곳에 논개의 생가가 복원돼 있으며, 장수읍 두산리에는 의암사(義巖祠)라는 논개사당과 논개의 수명비(竪名碑)가 세워져 있습니다. 한편, 논개의 묘는 경남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골짜기에 있는데, 사적지로 지정되어 묘역이 대대적으로 정화되어 있습니다.

장수와 함양 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논개의 일생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열네 살 되던 해인 1587년, 아버지 주달문이 죽자 건달인 숙부가 토호인 김풍헌에게 논개를 민며느리로 팔고 행방을 감추었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안 논개 모녀가 외가인 안의의 봉정마을로 피신하였는데, 김풍헌이 당시 장수 현감인 최경회에게 이를 알려 심문을 받게 하였습니다. 논개 모녀로부터 사실을 들은 장수 현감은 이들 모녀를 무죄로 인정하고, 관아에 머물며 병약한 현감의 부인의 시중을 들게 하였습니다. 논개의 재색에 감탄한 현감 부인은 남편인 최경회에게 논개를 소실로 맞이할 것을 권유한 뒤 지병으로 숨을 거두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논개가 18세 되던 해 1591년 봄, 최경회와 부부의 인연을 맺고 무장 현감으로 부임하는 최경회를 따라 장수를 떠났고, 1593년에 최경회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하여 진주성 싸움에 참가하게 되자 논개도 최경회를 따라 진주로 와서 진주성 함락으로 인하여 결국 최경회와 함께 순절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뒤 진주성 싸움에서 살아남은 장수 의병들이 최경회와 논개의 시신을 건져 고향땅에서 묻히게 하려고 운구를 하다가 결국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골짜기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의기사(義妓祠)

 

의기사는 촉석루 바로 옆에 이러한 논개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입니다.

 

효종 2년(1651) 양곡 '오두인'은 의암기(義巖記)를 지어 촉석루에 현판 하였으며, 경종 2년(1722)에는 명암 정식이 지은 비문으로 '의암사적비'를 세웠고, 영조 16년(1739)에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의기사"를 창건하고 '의암사적비'의 비석을 보호하기 위하여 비각을 세우고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을 세웠으며, 이후 여러 차례 중수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의기사 안에는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용모가 훤칠한 논개의 초상화 한 점이 모셔져 있는데, 본래는 친일 부역 화가인 이당 김은호가 그렸던 영성이 있었는데, 고증이 엉터리인 데다 친일화가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진주성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다는 여론이 많아 결국 지난 2005년 시민단체에 의해 강제 철거되면서 진주시는 새로운 표준 영정을 공모하여 2007년에 새로 모셔진 초상화 영정입니다. 

 

논개의 초상화 영정

 

의암 - 논개가 왜장을 끼어앉고 강물로 뛰어 들어들었다는 장소입니다.

 

의암에서 인증샷

 

 

 

쌍충사적비

 

의기사 옆에 있는 쌍충사적비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순국한 제말(諸沫) 장군과 그의 조카 제홍록(諸弘祿)을 기린 비입니다. 제말 장군은 곽재우와 제홍록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는데, 일제에 의해 비각이 헐리고 방치되었던 것을 1961년 현재 자리로 옮겨 세웠습니다. 

 


정충단

정충단은 숙종 12년(1686)에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충절을 다한 이들을 위해 촉석루 동쪽에 마련한 제단입니다. 최근에 만들어놓은 진주성 임진대첩 계사순의단(癸巳殉義壇) 앞쪽 마당에 두 개의 위령비가 나란히 서 있는데, 하나는 3 장사라고 일컫는 김천일(金千鎰), 황진(黃進), 최경회(崔慶會) 및 그들과 함께 똘똘 뭉쳐 싸워 장렬하게 순국한 군관민의 영령을 기리는 촉석정충단비이며, 또 하나는 제1차 진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낸 김시민 장군의 전공을 기린 김시민 장군 전공비입니다. 김시민 장군 전공비는 광해군 11년(1619)에 세웠졌습니다.

 

영남포정사 문루 

 

진주성내 중심부 언덕에 솟아 있는 문루는 진주성의 동문으로, 고종 32년(1895) 경상도가 남북으로 분리될 때까지 관찰사 청사(廳舍)의 관문이었으며, 영남포정사라 하였습니다. 이는 대변루(待變樓), 망미루(望美樓)라고도 불렸습니다.

영남포정사

 

영남포정사 문루

 

 

 

북장대

 

진주성 북쪽 제일 끝 높은 곳에 있어 성벽 바로 밑은 물론 성 안팎을 두루 살피며 지휘할 수 있는 요지에 세워진 북장대는 군사 건물의 모범이라 할 만큼 잘 건축된 망루입니다. 임진왜란 때 망가진 것을 광해군 10년(1618) 남이흥(南以興)이 중건한 이래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렀는데, 작년인 2021년 11월 18일에도 보수공사를 하였습니다. 다른 이름으로 진남루(鎭南樓), 공북루(拱北樓)라는 별칭도 갖고 있습니다.

 

북장대에서 바라본 진주시내 모습 - 현재시점이 대통령 선거 전인데, 한 후보의 광고 간판이 보이는군요...^^

 

 

 

창렬사/호국사/서장대

 

북장대에서 국립진주박물관 뒤쪽으로 난 성벽을 따라 돌아가면 서장대 아래쪽에 창렬사와 호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창렬사는 김시민과 김천일·황진·최경회 등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며, 호국사는 원래 산성사(山城寺)로 고려 때 성을 고쳐 쌓으면서 승병을 양성하기 위해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절입니다. 이 절은 임진왜란 때 승병의 근거지가 되었으며, 전쟁이 끝난 뒤 전사한 승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호국사라는 이름으로 재건되었습니다.

 

서장대는 성의 서쪽 구역을 경계하는 문루입니다.

 

서장대 인증샷

 

서장대

 

 

 

먹거리 ;

 

진주냉면은 평양냉면, 함흥냉면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냉면으로 하연옥 진주냉면(055-746-0525 ; 진주시 진주대로 1317-200)이 유명하고, 육회비빔밥은 전황식당(055-741-2646 ; 진주시 촉석로 207번길 3)과 제일식당(055-741-5591 ; 진주시 중앙시장길 29-2)이 유명한데, 이곳은 중앙시장 길목에 위치하여 주차를 하기가 어려운 난점이 있습니다. 또한 진주꿀빵으로 유명한 덕인당(055-741-5092 ; 진주시 장대로 43번길 12-1)이 있으며, 이밖에 진주성 인근의 중앙시장에 숨겨진 맛집, 분식집(황소분식, 삼성분식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