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 풍양궁터에 세워진 비가 있는 현각 >
풍양궁은 조선건국 후, 한양 천도 이후에 이전부터 양주 풍양으로 불리우던 옛 터(현 남양주군 진접읍 내각리)에 지어진 조선의 4대 이궁 중에 하나이다.
풍양궁이라는 이궁은 조선 초기인 세종대에 세워지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조선이 개국은 하였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고려의 수도 개경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상황에서 조선은 확실하게 수도를 정하지 못하고 정종과 태종대까지도 개경 환도와 한양 재천도를 되풀이 하곤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개국한지 얼마되지 않은 조선으로서는 왕권을 약화시키고 고려에 대한 미련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어서 조선으로서는 이를 빨리 억제시켜야만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새로운 나라로 개국은 하였지만 여전히 고려의 수도 개경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는 것은 왕권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좋지 않는 결과를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태종은 한양으로 수도를 확실하게 정하여 재천도를 하였다. 그러나 재천도 이후에도 여전히 몇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종묘와 왕의 피방을 위하여 사용하는 이궁이 여전히 개경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한양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왕이 개경으로 가서 일정기간 머물러 있었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므로 신하들이 개경 재천도의 의식를 버리지 못하게 하며, 한양은 임시 수도라는 의식을 갖게 하는 상황이 될 수가 있었다. 그래서 태종은 이를 확고하게 시정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 4대 이궁이고, 그 중에 동이궁으로 불리어진 것이 바로 풍양궁이다.
풍양궁은 영조때 세운 구궐유지비(위 사진)에서 조선을 건국한 초대왕인 태조가 머물러 있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사실이며, 이러한 잘못된 이야기를 『조선왕조실록』을 통하여 바로잡아서, 이곳에 이궁을 세운 목적, 조성 과정,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러준 이후 풍양궁에서의 거치 상황, 태종 사후 세종대 이궁의 운영, 세종이후 이궁의 운영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이궁(離宮)의 설치 목적
태종은 한양으로 재천도 이후에도 계속 문제가 되었던 신하들의 개성 환도 주장을 막고, 한양을 수도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추진한 것이 바로 이궁을 수축하는 문제였다. 다시말해서 어떤 위기 상황이 발생하였을 때 일정기간 동안에 피방이나 혹은 종묘 제사를 위하여 개성으로 가야하는 번거러움과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신하들의 개성으로 환도하려는 의식을 갖는 것을 잠재우기 위한 방편으로 새로운 수도인 한양을 중심으로 주변에 4대 이궁을 설립하고자 한 것이다. 그 중에 하나가 양주에 세워진 풍양궁이었다.
풍양궁은 조선 초기 세종대에 설치한 이궁으로 현재 행정구역상으로 남양주군 진접읍 내각리에 세워졌던 것이다. 당시 도성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풍양궁, 서쪽에는 연희궁(衍禧宮), 남쪽에 낙천정(樂天亭 : 일명 臺山離宮 : 오늘날 성동구 자양동 위치)을 지어 이를 삼이궁이라 칭하였다. 삼이궁의 설치계획은 태종대에 있었으나 세종 초기에 이르러 준공되었으며, 도성을 중심으로 서울 교외 사방에 위치하였다.
이궁의 설치 목적은 첫째, 피방(避方)의 목적이 있었다. 도성 주위에 이궁을 설치한 것은 일찍이 왕자의 난으로 어려움을 겪어봤던 조선초기의 왕들로서는 임금의 피방을 위한 장소로 쓰기 위하여 건설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왕실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든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을 때 이러한 어려운 상황을 피하기 위하여 도성 가까운 곳에 이궁을 지어 놓고 피방의 장소로 삼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수도인 한양 주변에 이궁을 조성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궁궐에서 부엉이가 우는 변괴 때문이었다. 1419년(세종 1) 태종은 궁궐에서 부엉이가 울자 옛 기록을 찾아보고 새가 우는 것은 흉한 징조라고 하여 피방할 장소를 물색하게 하였다. 개경 근처에 기존 이궁이 있기는 하였으나 개경까지는 길도 멀고 왕래하는 폐단이 있었으므로 서울과 가까운 포천과 풍양에 본궁(本宮) 노자(奴子)만으로 10여 칸을 지었다. 낙천정을 거쳐 포천으로 내왕하면서 흉한 방위를 피하고자 함이었다. 그리고 포천과 풍양에 이궁을 조성했던 이유는 방위가 맞기도 했지만, 본궁에 딸린 전토와 백성이 많아서 축조에 어려움이 적었기 때문이다. 풍양은 노자만 있고 전토는 없었으나, 옛 읍터에 집을 짓고 또 오래되고 사용하지않던 토지를 노자에게 주어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게 하면 되었다. 그리하여 1419년 11월부터 풍양현 옛터에 이궁을 짓기 시작하였다.
해마다 재액을 피하는 방위가 달라지기 때문에 이궁은 사방(四方)에 있어야만 했다. 태종은 남쪽에 낙천정을, 동쪽에 풍양궁을 건설하는 한편, 서쪽에도 피방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무악(毋嶽)의 명당자리에 100여 칸을 넘지 않도록 이궁을 짓게 하였는데 이것이 연희궁이다. 태종은 풍양궁의 침실이 완성되자 이궁 축조를 보고 나서 감역관(監役官)인 박자청(朴子淸) 등과 군사들을 위로한 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항간에 술사(術士)의 말에 의하면 액운을 당하면 천피(遷避)를 함이 마땅하다고 하였는데 두 번이나 송도(松都)에 행차할 때 운송비용이 실로 적지 아니하였으므로 도성 남쪽에 낙천정(樂天亭)을 건축하고, 동쪽에 풍양궁을 건축하였으며, 서쪽에 무악궁(毋岳宮)을 건축하게 한 것이다. 이리하여 수시로 왕래함으로써 생기는 폐단을 덜게 하는 것이다.
왕실에서 흉한 일을 당하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을 경우 이궁으로 잠시 옮겨가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조선 초기 한양으로 천도한 후 피방의 장소로 개경 주변의 이궁을 이용하기에는 거리도 멀고 많은 비용이 소요되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한양 주변에 이궁을 건축했던 것이다.
한양 주변에 이궁을 설치한 또 다른 이유는 한양을 명실상부한 서울로 자리 잡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양 천도 이후 왕이 자주 개경으로 왕래하면 개경에 대한 미련이 남게 되고 이것은 곧 신하들의 개경 환도를 뒷받침해주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궁의 본래 목적은 피방의 수단이었으나 조선 초기 한양 주변에 새롭게 이궁을 세웠던 것은 왕궁으로서의 규모를 갖추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개국 초 혼란한 정국 속에서 피방을 목적으로 이용되었던 이궁은 국가 체제가 정비․안정되고 후기로 넘어오면서 왕의 시어소(時御所) 또는 휴식처로 사용되었다.
풍양궁의 조성
풍양궁은 보통 동이궁(東離宮)이라 한다. 경성부사(京城府史)에는 양주군 접동면에 있다고 명기되어 있고, 서울명소고적에도 양주군 진접면이라 적혀 있다. 한편 풍양이란 지명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양주목의 속현으로 나온다.
풍양군은 주(州)의 동쪽 50리에 있으며, 본래 고구려시대 골의노현이며, 신라가 황양으로 고쳐 한양군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때에 풍덕으로 고치고, 현종 9년 양주에 속하고 후에 포주에 속하다가 조선시대 세종 원년 본래로 귀속되었다.
이어 궁전조(宮殿條)에는 풍양궁의 위치를 풍양현 동쪽이라 하였다. 궁궐지(宮闕志)의 풍양궁조에는 풍양궁이 양주 동쪽 50리 되는 폐지된 풍양현의 동쪽에 있으며, 1401년(태종 1)에 건축하고, 태상왕(태조)이 왕위에 있을 때 자주 왕래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이후 영조대에 와서 궁터(宮墟)에 비를 세웠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 양주도호부조에는 “풍양궁은 부(양주부)의 동남쪽에 있는데, 곧 풍양현의 옛터이며, 또한 태종이 거둥하여 계시던 곳이다.”라고 하였다. 이 기사를 보면 서로 내용이 맞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궁궐지에서는 풍양현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고, 세종실록지리지 양주도호부조에는 풍양현의 옛 터라고 하였다. 그러나 풍양궁 설치에 대한 내용이 자세하게 실린 세종실록을 보면 “풍양은 전토는 없으나 옛 읍터에 집을 짓고, 또 묵은 밭을 노자에게 주어 생계를 돕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풍양궁의 위치는 풍양현의 옛 읍터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조선건국 초의 지방제도 정비과정에서 경기도를 좌․우도로 나누었는데, 이 때 풍양은 장단(長湍)․사천(沙川) 등과 함께 좌도에 속하였고 이후에는 양주의 속현으로 존재하였다. 풍양은 한양 가까이 있었던 관계로 왕실의 사냥터로 이용되었다.
임금이 상왕(上王)을 모시고 풍양에서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였다. 다음날 산곡동(山谷洞)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임금이 노루 한 마리를 활로 쏘아 잡았다.
위의 기사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풍양은 건국 초기부터 왕실에서 사냥을 즐기던 곳이었다. 이후 살곶이(현 성수동)목장, 녹양(현 의정부)목장이 왕실에서 사용하는 말들을 공급하면서 비교적 한양과 가까운 풍양으로 사냥을 많이 오게 된 것이다. 이에 국가에서는 양근(楊根)․광주(廣州)․풍양 등을 강무장으로 정하고 개인이 사냥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풍양궁의 조성에 대하여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1419년(세종 1) 11월이었다. 태종은 부엉이가 우는 것을 흉한 징조로 보고 도성(都城)을 떠나 이궁으로 피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마땅한 이궁이 없어서 서울 가까운 곳에 이궁을 짓게 한 것이 풍양궁이다. 태종은 피방의 장소를 물색하게 하는 한편 한양 근처인 포천과 풍양 등지에 본궁 노자만으로 집 10여 칸을 짓게 하였다. 그 중에서 풍양은 전토는 없으나 노자(奴子)가 있기 때문에 풍양현의 옛 읍터에 집을 짓게 하고 노비들에게 묵은 밭을 주게 하였다. 이렇게 이궁을 건설하기로 결정한 후 태종은 이궁 터를 선정하기 위해 친히 풍양과 포천 등지를 살펴보았고, 그 결과 풍양의 옛 읍터에 집을 짓게 하였던 것이다.
같은 해 12월 태종은 병조로 하여금 방패보충군(防牌補充軍) 및 당영선군(當領船軍)을 천보산(天寶山)으로 보내 재목을 벌채하여 포천․풍양으로 수송하도록 하였다. 목재를 수송하면서 이궁의 역사(役事)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풍양이 당시 포천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집을 짓거나 인부를 동원하는 문제 등이 대두되자 풍양을 양주도호부에 합치시켰다. 이궁 영조를 위하여 본현 및 경중각사의 연례수납미곡(年例輸納米穀)을 모두 현내(縣內)에 있는 연복사(演福寺)에 쌓아두게 하였다. 이궁수축미가 양주 연복사에 보관되어 있었던 관계로 포천 소속인 풍양을 양주로 합치하라고 하였다. 이후 태종은 이궁 역사를 보기 위하여 서울과 40여 리 정도 떨어진 풍양으로 자주 행차하였다.
1420년 1월, 역사를 시작한 지 10일 만에 침전(寖殿)이 완성되자 태종과 세종은 광나루(廣津)로 해서 풍양에 행차하여 이궁을 보았다. 태종은 이궁을 짓는 데 참여한 동역관(董役官) 박자청(朴子淸) 등에게 술과 과일을 내려 군인들을 위로하고, 여러 신하들과 주연을 베풀었다. 또한 이궁이 완성되자 태종과 세종은 이궁을 구경하였으며, 같은 해 2월 중순에 대비가 먼저 낙천정에서 풍양궁으로 옮겼다. 이에 변계량 등이 문안하자 태종은 많은 사람들이 문안하는 것을 제한하기 위하여 부원군(府院君) 이하는 허락을 얻은 후에 풍양궁에 문안하도록 하였다. 그 다음날 태종은 풍양궁 남쪽에 장전(帳殿)을 설치하고 거처하다가 3일 후에 낙천정에서 풍양궁으로 옮겼다. 이후 태종과 대비가 풍양궁에 거처하는 관계로 세종이 자주 풍양궁을 왕래하였다. 태종은 낙천정과 풍양궁을 수시로 왕래하면서 거처하였다.
풍양궁터에서 대략 500여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내동이란 동네는
태종의 부인 원경왕후가 병환을 고치기 위해 임시 거쳐로 쓰던 장소라고 하는데,
아직도 군데 군데 옛기와로 지어진 집이 몇몇채가 남아 있다.
하지만 이것이 그 당시 흔적이라는 증거는 없다.
그런데 이렇게 외진 시골 동네에 아직도 옛기와로 지어진 민가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풍양궁의 이용
세종대에 풍양궁은 주로 피방처나 상왕인 태종의 거처로 이용되었다. 풍양궁을 수축하고 가장 먼저 대비가 거처를 옮겼는데 병을 치유하고자 공기가 맑고 산수가 좋은 곳에서 지내려고 하였던 것이다. 1420년 5월에 대비가 한점(寒痁)으로 학질병(微恙)을 앓게 되자, 6월부터 대비의 회복을 위한 여러 가지 방법들이 행해졌다. 세종은 양녕(讓寧)․효령(孝寧)과 더불어 대비를 모시고 도가류(道流流)의 승려 해순(海恂)으로 하여금 풍양궁 근처에 있는 오부(吳薄)의 집으로 가서 둔갑술을 행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에도 대비가 승하하자 풍양궁에는 태종이 거처하였다.
또한 사냥터로서도 자주 이용되었다. 고려시대 한양과 양주․풍양 등지는 국방의 군사 요충지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고려 중기 이후 점차 군사적 요충지에서 왕실의 휴양지로 성격이 변화하면서 풍양은 왕실의 사냥터나 휴양지로 이용되었다. 이와 같은 면은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비슷하였던 것 같다. 서울과 가까운 장소였던 관계로 사냥에 주로 이용하였는데, 세종초의 기사를 보면 태종이 풍양궁에 거쳐하면서 매사냥을 하거나 고기잡이를 구경하는 기사가 자주 보이고 있다. 태종이 풍양궁의 서산(西山)․북산(北山)․동산(東山) 등지에서 사냥을 즐기고, 풍양 북촌(北村) 괘라리(掛羅里 : 현재의 오남면 양지리가 괘라리로 추측됨)의 산골에서 놀이하고 작은 잔치를 베풀었다는 데서도 사냥터로서 이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풍양궁은 여름 휴식처로도 널리 이용되었다. 1421년 풍양궁에 있던 태종이 단오절이 임박하여 석전희(石戰戱)를 보기 위하여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풍양궁을 떠나 도성으로 가려고 하였지만 도성에서 여름을 나기가 어려울 것이라 하여 다시 풍양궁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로써 풍양궁은 태종의 여름 휴식처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부속물 수축과 조경사업
풍양궁이 완성된 후 휴식공간의 하나로 1420년 6월 하순에 수각(水閣)을 만들었다. 수각은 연못 속에 만든 일종의 정자(亭子)이다. 병조로 하여금 방패군(防牌軍)과 보충군(補充軍)을 동원하여 이궁 서쪽에 연못을 파고 축대를 쌓고 못 가운데 정자를 짓게 하였다. 이 정자는 매우 청아하고 상쾌한 곳이라고 한다. 수각이 완성되자 태종은 이곳으로 여러 신하들을 불러 술을 마시거나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 이용하였다. 수각의 규모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크지는 않은 듯하다. 1421년 5월에 태종이 영평(永平)으로 가려다가 더운 날씨 때문에 가지 못하고 수정(水亭 : 수각)에서 여러 신하들과 술을 마셨는데 3품 이상의 관원이 모두 입시하였다는 기사를 보면 규모가 컸던 것 같기도 하지만, 그 해 8월 풍양이궁 수각에서 치주진락(置酒秦樂)의 놀이를 즐겼는데, 이 때 수각 위에는 7~10명 정도만 앉고 나머지는 수각 아래에 앉았다는 기록에 의하면 대략 7~10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규모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1422년 4월 중순에 수각이 무너졌는데, “큰 바람에 기둥이 뽑혀 정자에서 십여 보쯤 떨어진 북쪽 언덕에 날아갔는데 마치 사람이 뜯어서 쌓아 놓은 것 같았다”고 한다. 이후 정자는 다시 축조되었는데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1525년(중종 20) 광릉 참배 후에 수행한 종재(宗宰)․종2품(從二品) 이상, 병조․도총부․별운검(別雲劒)․대간․홍문관․승정원․주서(注書)․한림을 대주정(大晝停) 때 인견(引見)하고 공궤(供饋)하려 하는데, 다만 누상(樓上 : 풍양궁루)이 좁으므로 종1품 이상은 누상에 앉고 정2품 이하는 누하(樓下)에 앉도록 하였다. 세종 이후 어느 시점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다시 수축된 것만은 확실하며 규모는 종1품 이상만 앉을 수 있을 정도로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연못은 휴식을 위한 공간이지만, 여름을 보내기 위해서는 얼음이 필요하였다. 당시 얼음은 일부의 사람들만이 먹을 수 있는 것으로 태종이 이궁에서 여름을 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에 정자를 건축하는 한편 빙고(氷庫)를 지었다. 1420년 12월에 태종은 얼음 창고가 풍양궁과 거리가 멀어 운반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하여 이궁 동쪽에 별도로 빙고를 만들게 하였다. 그러나 규모 등 구체적인 사항은 현재 알 수 없다.
또한 주변 조경 사업으로 병조에 명하여 하인들과 인부를 징발하여 풍양궁과 함께 서이궁․헌릉․광효전의 뒷쪽 언덕에 소나무를 심게 하였다. 소나무를 심게 한 것은 숲을 푸르게 하는 의미와 함께 주변을 보기 좋게 하는 의미, 즉 소나무가 가지는 상징성 때문에 적극적으로 심게 하였다. 소나무가 마르거나 병충해를 입으면 인력을 동원하여 송충이 등 해충을 잡게 하였다.
풍양궁의 관리(官吏)
풍양궁을 관리하는 관원은 수적인 면에서 다른 이궁과 비슷하였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특히 낙천정이나 연희궁은 풍양궁과 같은 용도였으므로 그 곳과 풍양궁을 수직하는 관리들의 인원수는 비슷할 것으로 생각되나, 실제 수직 관리수는 차이를 보인다. 낙천정은 내시․다방별감의 수를 각 10명으로 하였던 반면, 풍양궁의 전수(典守)는 내시(內侍)․다방별감(茶房別監) 각 2인이 돌아가면서 입시하도록 하였던 것으로 보아 상대적으로 거리가 멀어 관리하기가 다소 어려움이 있어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수축과 관리
태종이 죽고 난 후 풍양궁에는 왕이 거처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왜냐하면 세자는 연희궁 등 서울에서 상대적으로 가까운 곳에 거처하였고, 이후 창경궁 등이 수축되어 피방의 방편으로 이용되었다. 이에 상대적으로 거리가 먼 풍양궁은 관리가 허술하게 되었다.
1434년(세종 16)에 풍양궁은 낙천정과 함께 태종이 거처하였던 장소로서 소중한 곳이라 하여 수호와 관리를 위하여 대안을 제시해 줄 것을 요구하자 먼저 내시별감을 나누어 보내어 이들에게 별사(別仕)를 주어야 한다는 의견과 왕자 제군에게 내려주거나 아니면 철거하여 국용으로 사용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에 수직하는 관리로 풍양궁에는 내시․다방별감 각 2인을 낙천정에는 각 10인을 두어 그 곳을 관리하게 하였다. 이들의 근무일수는 2일을 한 번(番)으로 하였다. 즉 평상시에 거처하는 장소가 아니기 때문에 수직하는 관리만을 두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수직하는 관리만 두게 된 것은 세종이 사냥이나 놀이를 별로 즐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풍양궁의 관리는 이후 계속 소홀히 다루어졌는데, 1441년(세종 23) 11월에 집현전부제학 최만리(崔萬里)는 흥천사 사리부도(舍利浮屠)의 경찬회 개최에 대한 잘못됨을 지적하면서 태종이 거처하던 풍양궁과 낙천정은 잡초가 무성하다고 상소하였다. 이에 대하여 왕은 승정원에, “풍양궁과 낙천정은 비록 선왕께서 납시던 곳이나 항시 납시는 곳은 아닌데, 하필 창호를 바르고 자리를 펴겠느냐, 요(要)는 새고 허물어지거나 쓰러지지 아니하게 하면 그만일 것인데, 이 상서(上書)를 보면 후세에서 나를 성왕의 옛 궁을 헛되게 버렸다고 하지 않겠느냐.”라고 하였다. 이에 도승지 조서강은 이미 삼이궁은 선공판사(繕工判事) 이하로 나누어 맡아서 완전히 갖추어진 여부를 고찰하고 이유를 기록하여, 만일 쓰러지는 것을 곧 수리하지 아니함이 있으면 유사로 하여금 추핵(推劾)하게 하는 법이 만들어져 있다고 하였다. 항상 거처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수직하는 관리만을 두어 허물어지지 않게 하였다.
영응대군(永膺大君)에게 하사
풍양궁은 태종이 승하한 후 거처하는 왕이 많지 않았고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관리에 소홀하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1449년(세종 32) 집현전과 군자판관(軍資判官) 조휘(曹彙) 등이 영응대군의 집이 너무 화려하고 웅장하여 법도에 어긋난다며 문제를 삼자, 세종은 영응대군의 집은 법제에 어긋나는 것이 없을 뿐 아니라 본래 인군(人君)의 노모를 거처하게 하려고 지은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이 계속 잘못되었음을 건의하자 풍양이궁을 수선하여 영응대군의 저택으로 하사하였다. 하지만 이후 계속해서 영응대군의 저택으로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강무장시 이용
풍양궁은 태종 사후에 수직하는 관리들만 두어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만 관리하였다. 그러나 이전부터 풍양은 왕궁과 가깝다는 이유에서 강무장으로 자주 이용되었으며 태종 사후에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1446년 정월에 세자가 철원(鐵原) 등지로 강무하는 것은 농사도 실패한 터에 폐단이 많을 것이라고 하자 세종은 일찍이 자신이 강무했던 풍양 등지에서 하루 100여 마리의 짐승을 잡은 일이 있다고 하면서 풍양으로 강무하라고 하였다. 1448년 12월에는 삼군진무소(三軍鎭撫所)가 강무장을 선정하면서 풍양현(豐壤縣)의 입관산(入串山)․거질을산(居叱乙山)과 적성현(積城縣)․양주(楊州)․포천현(抱川縣)․가평현(加平縣)․원평부(原平府)․고양현(高陽縣)․광주(廣州) 등지의 산을 강무장으로 삼고 벌목(伐木)을 금하게 하였다. 이렇게 한성과 가까운 곳을 강무장으로 삼으면서 자연스럽게 풍양궁은 숙소로 이용하게 되었다. 강무는 한 번 이동할 때의 번거러움과 비용, 백성들의 피해 등을 고려하여 가뭄이나, 실농(失農) 때에는 먼 곳의 강무장을 피하고 가까운 곳으로 바꾸게 되었다. 이때 서울과 가까운 천마산과 묘적산 등지는 강무장으로 아주 적절한 장소였다.
세종에 비해 세조는 풍양궁을 자주 이용하였다. 1458년(세조 4) 9월에 세조가 풍양 등지에서 사냥하고 저녁때 이궁에 머물러 잤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에 1459년 정월에 세조는 병조판서 한명회, 선공감제조(繕工監提調) 박강(朴薑), 도승지(都承旨) 조석문(曹錫文)에게 명하여 풍양에 가서 이궁의 허물어진 곳과 제언(堤堰)을 쌓을 만한 땅을 살펴보게 하고, 환관(宦官) 홍득경(洪得敬)을 보내어 선온(宣醞)과 내수(內羞)를 가지고 가서 위로하게 하였다. 그리고 며칠 후 선공감(繕工監)에 명하여 군인 500명을 거느리고 풍양궁을 수리하게 하였다. 세조는 풍양의 성산(城山)에서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고, 수종한 종친(宗親)․재추(宰樞)․야인(野人) 등과 함께 이궁에 거둥하여 술자리를 베풀었다.
태종께서 이 궁(宮)에 계실 때 세종(世宗)께서 조계(朝啓)를 받던 곳인데, 유적(遺跡)이 완연(宛然)하니, 감창(感愴)한 마음을 이길 수가 없다. 나도 또한 중수(重修)하여 봄․가을 강무(講武) 때 이곳에 거처하겠다.
위의 기사를 통하여 세종대 영응대군의 거처로 사용되고 있었던 것을 다시 세조가 강무시 숙소로 사용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이궁을 다시 수축하게 하였다. 왕은 이궁 축조에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주서(注書) 하한근(河漢近)에게 명하여 선온(宣熅)을 가지고 풍양이궁에 가서 선공감제조(繕工監提調) 박강(朴薑)에게 내려주기도 하였다. 또한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도승지(都承旨) 조석문(曹錫文)․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전균(田畇)을 풍양이궁에 보내어 수리(修理)하는 곳을 살펴보게 하였다. 이궁 축조를 겨울철에 시작한 이유는 농한기를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한편 풍양천에 방천(防川)을 만들게 하였는데, 이궁 앞에 흐르는 풍양천 냇가에 제방을 만드는 일은 야인(野人) 중추(中樞) 이두리(李豆里)에게 지시하였다. 그러나 병조판서 한명회와 도승지 조석문(曹錫文)이 방천의 공사가 지극히 어려워 농사철 이전에 끝내지 못하니 우선 정지하였다가 가을 추수 이후에 계속하게 하자고 청했다.
세조가 풍양궁을 강무시 숙소로 사용하기로 한 이후 자주 이곳에 거둥하자 신하들은 풍양궁은 태종이 유람을 하기 위하여 만든 곳으로 지금은 시대가 다르다고 하면서 빨리 환궁할 것을 건의하였다. 태종이 처음 이궁을 만든 목적은 피방의 뜻과 함께 정사를 세종에게 물러주고 유람을 하기 위해서였지만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으니 이궁에 오래 머물지 말기를 청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세조는 군사들로 하여금 10일의 양식을 가져오게 하였으니 갑자기 환궁할 수 없다고 하면서 피해를 끼치는 사람만 단속하라고 하였다. 세조는 풍양(豊壤) 냇가의 산봉우리에 올라 화천군(花川君) 권공(權恭)을 좌상대장(左廂大將)으로 삼고, 중추원사(中樞院使) 박강(朴薑)을 우상대장(右廂大將)으로 삼아서 군사를 나누어 거느리고 습진(習陣)하게 하였다. 즉 강무시 연습장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풍양이궁은 태종․세종조에는 피방을 위한 장소나 휴식공간으로 이용되었으나 세조대에는 강무의 장소로 이용되었다. 강무장으로서의 역할은 이후 성종대에도 비슷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473년(성종 4) 10월에 성종이 풍양에서 강무한 이후 풍양궁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보인다. 즉 풍양궁은 세조 이후 강무의 장소로 널리 이용되었고, 풍양은 관렵지로 이용되었다. 이와 같이 강무장으로 사용된 이유는 한양과 가깝다는 것과 한강을 건너는 경우 비바람이 불게 되면 피해가 크다는 점, 풍양은 가까우면서도 짐승이 많이 잡힌다는 점 등이었다.
연산군대 금표비(禁票碑)의 설치
연산군은 재위 기간 동안 마음대로 제도를 개편하고 자신에게 대항하는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등 폭정을 일삼았다. 연산군은 자신의 사냥터를 확보하기 위해 도성 주변의 산에 강무장을 만들고, 그 곳 안에 있는 사람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연산군은 한양 근처를 사냥터로 정하고 여러 곳에 금표비를 세웠다. 이에 연산군은 여러 곳의 건물을 다시 수축하게 하고 병사에게 그 곳을 지키게 하였다. 1499년(연산군 5) 9월에 연산군은 풍양궁과 벽제관(碧蹄館)을 수리한 후에 병조로 하여금 사람을 시켜 수직하게 하고 거둥을 기다리게 하였다. 연산군은 사냥을 즐기기 위하여 풍양궁을 수리한 후 사냥에 전념하였다. 상황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자 신하들은 풍양궁에서 밤을 새우며 사냥을 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은 무령군(武靈君) 유자광(柳子光) 등에게 명하여 사장(射場)의 편리 여부를 가서 살펴보고 도형(圖形)을 만들어 아뢰게 하였다.
경성(京城)에서 주엽산천점(注葉山泉岾)까지의 거리가 70여 리니, 성상의 옥체가 수고로우실까 염려됩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거가(車駕)가 떠나는 날 풍양궁(豊壤宮)에서 주무시고 이튿날 주엽산, 또 이튿날 천점, 또 이튿날 아차산(峨嵯山)에서 사냥하시는 것이 편할 것 같습니다.
연산군은 사냥을 할 때면 풍양궁 등지에 몇일이고 머물면서 할 만큼 사냥에 몰두하였다. 이에 사냥터 안에 있는 백성들에 대한 규제를 실시하였는데, 이것이 금표비의 설치이다. 먼저 서울 주변지역 중 풍양궁을 금표 안에 넣고, 이후 광릉산천점(光陵山泉岾)과 풍양산까지 금표지역으로 정하였다. 광릉 봉선전과 봉선사에 출입하는 사람의 수를 다른 능의 예대로 줄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금표지역을 현재 남양주 일대까지 확대한 것은 백성들이 풀을 베거나 나무를 하여 짐승들이 줄어드는 것을 막겠다는 것과 사냥시 백성들의 눈을 피할 수 있다는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풍양이 금표안에 속하게 되면서 자연히 풍양현은 없어지게 되었다. 한편 고양(高陽)은 파주에 부치고 풍양의 곡식 1018석을 양주에 부치게 하였다. 이와 같이 풍양궁을 사냥시 숙소로 사용하였는데, 이때 이궁은 고려시대의 장원정(長源亭)과 같이 조선 초기의 연희궁․낙천정․풍양궁 등도 국정을 바르게 하기 위해 지어진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중종대 이후 광릉 참배
중종대에 풍양궁은 대주정(大晝停), 즉 왕의 행차시 머무르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중종이 풍양궁을 대주정으로 삼은 것은 1523년(중종 18) 흉년으로 먼 곳까지 참배할 수 없게 되자 추석을 기하여 광릉에 참배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봉선전에서 다례(茶禮)를 거행하고 궁으로 돌아올 때는 사냥을 구경하고자 하였다. 풍양궁은 태종이 기거하던 곳이고, 세종도 때때로 거둥하던 곳이라 하여 병조로 하여금 겸사복(兼司僕)을 보내어 길을 살피게 하라고 하였다.
1525년에도 왕이 광릉에 참배하려고 하자 신하들은 광릉 참배의 일은 효성에 관한 일이라 반대할 수 없으나 ?오례의주(五禮儀註)?에 ‘능소(陵所)에 멀리 떨어져 있으면, 하루 전에 행궁(行宮)으로 가서 재숙(齋宿)한다’는 규정이 있으니 거처할 장소를 마련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유숙할 능침은 공한지(空閑地)여서 수치(修治)에 폐단이 있으며, 봉선전은 재소(齋所)로서 불가하며, 풍양궁은 능소와 가까우므로 합당하다고 하였다. 장소가 정해지자 경기도사로 하여금 풍양궁과 교량을 수리하도록 하였다. 신하들은 경기지방에 흉년이 심하여 폐단이 심할 것이며, 특히 풍양궁은 비워둔 지 오래되어 7~8일 만에 수리하도록 하는 것도 피해가 많을 것이니 가을에 참배하도록 청하였다. 풍양궁의 사방에 보리밭이 많아 민간에 피해가 많을 것이고 오랫동안 비워둔 곳에 왕이 거처하는 것은 불가하며, 온돌에 뱀이나 지네 등의 위험이 있을 수 있으니 연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지만 왕은 큰 염려가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대로 진행하게 하였다. 이에 포영사(布營使) 안윤덕(安潤德) 등이 숙어소의 안팎 성을 결진할 상황을 도표로 그려 보고하고 풍양궁에 독충이 나타날 위험이 있으니 봉선전을 숙소로 정하자고 하였지만 봉선전은 좁은 골짜기에 있어 진(陣)을 칠 수 없다고 하여 계획대로 진행하게 하였다.
1536년 7월 중종은 그 해 10월 11일에 녹양장에서 대열하기로 결정하고, 대열한 후에 병기와 군복의 점고를 마친 후 풍양궁에서 묵고 계속 강무하고자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조선 초기부터 풍양 일대의 현재 남양주지역은 왕의 강무장으로 꾸준히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구궐유지비(舊闕遺址碑)의 수축
조선 후기 풍양궁에 관한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임진왜란 등을 거치면서 어떤 연유로든 불타 버린 것으로 추정이 된다. 이와 관련된 기사로 1696년(숙종 22) 정월에 지평 이세재(李世載)가 명혜공주방(明惠公主房)의 궁인(宮人)이 대내의 분부를 받아 소를 잡고 제수를 장만하여 풍양궁터에서 이틀 동안이나 신사(神祀)를 베풀고 파하였는데 그 비용이 지극히 사치하고 풍성함을 비난한 기록이 주목된다. 이 기록에 의하면 풍양궁은 이미 건물이 불타고 터만 남은 것으로 보인다. 국가에서도 풍양궁에 대한 사용을 중히 여기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태종이 거처한 이궁에서 무당이 굿을 하였는데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종 이후 풍양현이 폐지된 다음 풍양이라는 지명은 거의 사용되지 않으나 현재 남양주지역 일대는 여전히 왕실의 강무장으로 사용되었다.
이와 같이 터만 남아있는 풍양궁에 비를 세우도록 한 것은 1755년(영조 31)의 일이다. 영조는 자신이 늙어 선릉(先陵)을 알현하고 풍양에 거처하려고 하는데 성조(聖祖)의 구궐(舊闕) 유지(遺址)에 표식(表識)이 없는 것은 잘못하면서, 경기감영으로 하여금 예조와 함께 양주 풍양의 태조대왕(太祖大王) 구궐 유지에 비(碑)를 세우도록 하였다. 이곳에 사용되는 석재(石材)는 칠릉(七陵 : 오늘날의 동구릉을 말함)의 것으로 하고 표석(表石)은 영건청(營建廳)의 남은 돌로 새겨서 세우라고 명하였다. 각 능의 비석 세우는 역사가 한창 펼쳐지는 시기이므로 여기에 동원되는 인력에게는 비국(備局)에서 저치미(儲置米)를 나누어주게 하고, 모든 일은 절대로 백성을 이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영조는 친히 비(碑)의 앞 뒤면에 썼는데 전면에 ‘태조 대왕 재상왕시 구궐 유지(太祖大王在上王時舊闕遺址)’, 후면에 ‘황명 숭정 기원후삼 을해 중춘에 이곳에 주정하면서 절하고 공경히 쓴다.(皇明崇禎紀元後三乙亥仲春晝停于此拜手敬書)’라고 썼다. 그리고 두 줄로 ‘지명 풍양(地名豊壤)’ 네 글자를 썼다. 이처럼 영조가 풍양궁터에 세운 비는 태종이 세운 이궁에 세운 것이 아니라 태조가 거처한 곳에 세운 것이다. 이와 같은 사연은 결국 세월이 흐르면서 이궁에 대한 사실이 잘못 전해진 결과로 보인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풍양궁은 왕실에서 피방을 위한 장소나 휴식처로 사용하기 위하여 태종이 계획하고 이후 왕위를 물려준 다음에 세종 초기에 완공하였다. 대비가 먼저 거처하고 이후 태종이 거처하였다. 이곳은 태종의 휴식공간으로 사용되다가 태종 사후 강무시 숙소로 사용하기 위하여 수축과 보수를 계속하였다. 세조는 강무를 목적으로 오랫동안 거처하기도 하였다. 현재는 비석만 남아 있고 주위의 지명만이 그곳에 궁지(宮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향후에 풍양궁에 대한 사적 조사를 통하여 그 실체가 철저히 밝혀져야 할 것 같다.
발췌 : 풍양궁(豊壤宮)의 조성과 운영 - 장희흥(동국대 사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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