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이덕일의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이란 책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
정약용은 송시열을 비롯한 조선 후기의 유학자들이 절대주의 사상으로 떠받들었던 주희(朱熹:주자)의 경학사상을 뛰어 넘었다. 유학의 가장 중요한 개념인 仁에 대해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마음의 덕이요, 사랑의 이치이다(心之德 愛之理)"라는 주희의 해석을 추종했다. 그러나 다산은 달랐다.
어질 인(仁)자는 두 사람을 뜻한다. 효(孝)로 아버지를 섬기면 仁이다. 형을 공순하게 섬기면 仁이다. 충(忠)으로 임금을 섬기면 仁이다. 벗과 믿음으로 사귀면 仁이다. 자애롭게 백성을 다스리면 仁이다. 仁을 가지고 동방의 물(物)을 낳는 이치니 천지의 지공한 마음이니 해서는 仁이 설명이 되지 않는다.
다산은 仁자는 人과 人을 중첩시킨 글자이며 "사람과 사람이 그 본분을 다하는 것이 仁"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仁을 가지고 동방의 물을 낳는 이치(理)니, 천지(天地)의 지공(至公)한 마음이니' 이라고 보던 성리학의 해석에서 벗어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구체적 인간관계 속에서 구현되는 실천 규범으로 바라본 것이다. 다산이 녹암 권철신을 높이 본 것은 사변적인 말장난을 벗어나 구체적 실천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며 다산은 '녹암권철신묘지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무렵의 학문이 사변적인 말장난에 빠져서 이기(理氣)나 말하고 정성(情性)이나 논란하면서 실천적인 면에는 소홀히 하고 있었지만 공의 학문은 한결같이 효제충신을 으뜸으로 삼았다.
다산에게 인은 사변적인 말장난이 아니라 구체적 실천행위였고, 그것이 바로 공자가 말한 서(恕:어짊, 용서)였다.
정약용은 공자가 말한 仁은 주희의 해석처럼 만물의 근원인 理가 아니라 인간 사이의 실천이며 그 실천 방법은 공자가 논어 '이인(里仁)'편에서 증자에게 말한 "나의 도를 하나로 꿰뚫는 것은 서(恕)다" 라고 보는 것이다. 이는 다산이 사변적인 중세 주자학의 틀을 넘어서 실천적인 고대 유학의 정신을 되살림으로써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는 맹자 성선설의 기초가 되는 사단, 즉 측은 수오, 사양, 시비의 마음과 그 구현형태인 인, 의, 예, 지의 관계에 대해서도 주희와는 달리 해석했다. 주희는 인, 의, 예, 지가 원래부터 인간의 내면 속에 부여되어 있는 것이라고 보는데 정약용은 도덕적 실천을 통해 성취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인의예지는 저절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사단을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사덕, 즉 인, 의, 예, 지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이는 주희가 인, 의, 예, 지를 성품의 '사덕'으로서 인간의 성품 속에 내재하는 것이라고 본 데 대한 전면적 부정이었다.
다산의 경학 사상은 이 점에서 성리학의 테두리를 뛰어넘는다. 정약용은 '자찬묘지명'에서 자신의 "맹자요의"를 설명하면서 성리학 천년 역사의 가장 핵심적인 본연지성(本然之性)을 분명하게 부인한다.
본연지성(本然之性)은 원래 불서에서 나온 것으로 우리 유교의 천명이나 성과는 서로 빙탄(氷炭)이 되어 함께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성리학의 본연지성이 유교의 천명지성과는 물과 불처럼 상반되는 것으로 유교가 아니라 불교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다산은 주희가 "성품은 인간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아 태어난 理다"라고 정의한 것 역시 부정하며 "성이란 기호(嗜好)다" 라며 성이 하늘이 부여한 이가 아니라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기호'라고 주장했다.
인간에게 성(性)은 기호이므로 선을 행할 수도, 악을 행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일생동안 수많은 악인들을 만나면서 체득한 결론일 수도 있다. 정순왕후 김씨나 서용보, 이기형, 홍낙안 같은 인간들의 성품이 어찌 원래 순수할 수 있겠는가? 다산에게 선은 인간의 순수한 성품에 따라 자동적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산이 '맹자요의'에서 강조한 것은 인간은 선을 좋아하는 성품의 기호를 길러서 자신의 결단으로 선을 선택하고 실행해 가야 한다는 거이었다. 이런 철학적 바탕 위에서 정약용은 자주지권(自主之權) 사상을 확립했다.
다산은 '맹자요의'에서 하늘이 인간에게 선을 행하고자 하면 선을 행할 수 있고, 악을 행하고자 하면 악을 행할 수 있는 결정권을 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자주지권'이라고 설명한다.
자주지권, 즉 자유의지에 따라 인간은 선을 행할 때 선을 행한 공을 이룰 수 있고, 악을 행할 때 악을 행한 죄를 짓는 것이므로 인간과 동물이 갈라지는 경계가 된다는 것이다. 인성론에 대한 다산의 이런 인식은 비단 '맹자요의'에만 들어나는 것이 아니라 '중용자잠'이나 '중용강의'에서도 일관되게 들어나고 있다. 이 부분이 이기론이니 사단칠정론이니 하는 사변적인 고담준론으로 일관하면서도 막상 자신들이 다스리는 현실사회는 멀쩡한 생식기를 잘라버릴 수밖에 없게 만든 조선의 위선적인 성리학자들과 다산이 근본적으로 갈라지는 지점이다. 그에게 철학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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