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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관련/불법(佛法)관련

업장소멸이란?

by 우둥불 2015. 2. 13.

 

 

업장소멸이란 지금까지 지은 업을 다 없애버리고
또 앞으로 새로운 업을 짓지 않음으로써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지은 업을 다 없애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며,

또 앞으로 새로운 업을 짓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지금까지 지은 업을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그것은 스스로가 받는 수 밖에는 아무런 방도가 없다.

 

이를테면 선업을 받는다고 하였을 때, 선업관계는 크게 두 가지가 될 것이다.

그 관계란 은혜를 입었기에 그 은혜를 갚아야 하는 관계와
은혜를 베풀었기에 은혜를 받아야 하는 관계일 것이다.

 

이를테면 불쌍한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을 도울 수 있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이것은 분명히 선업관계이다.


왜냐하면 도울 수 있는 연을 만난 것은

내가 그 사람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기에 지금 은혜를 갚기 위하여 만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그를 돕는다는 것은

전생(前生)에 자신이 지은 선업관계를 소멸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람을 도운 것이 아니라

그 사람 덕분에 나는 전생에 지었던 선업을 하나 소멸시키고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가 바로 공덕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남에게 신세를 지게 되었더라도
그 관계는 전생에 내가 도와주면서 만들어진 선업을 받아 소멸시킨 것이니
그 또한 나의 업장을 소멸시켜 주신 그러한 분인 것이다.

그러니 어찌 감사하지 않겠는가. 이 또한 공덕이 되는 것이다.
 

악업관계 또한 그러하다.
내가 그에게 원한을 가졌는지 아니면

그가 나에게 원한을 가졌는지
이 두 가지 악업관계에 의하여 만날 것이다.

 

상대가 나에게 전생에서 원한을 가졌다면
그 사람이 나에게 아무리 잘 해주려고 하여도 그 결과는 나에게 피해를 주는 관계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나에게 악업을 소멸시켜 준 사람이다.
그러니 이 또한 감사할 일인 것이다.


이것을 모르고 원망과 분노 속에서 그를 본다면

이것 또한 악업을 받고 또 악업을 짓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했어도 그 진실은 밝히려고 할지언정

누가 틀렸네 누가 옳네 하는 시비를 가려서 원망과 분노 속에서 살지 말고
감사의 마음으로 그 고통을 받아들일 때에
악업을 받았으되 새로운 악업을 짓지 않는 것이 된다.

 

그 다음 내가 아무리 잘 해주려고 했어도

그 결과가 그에게 커다란 피해를 주고 그에게 원망을 사게 되었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모르고 원망만 한다고 억울해 하고 그를 미워만 한다면
그것 또한 악업을 받으면서 또 새로운 악업을 짓게 되는 것이니
이 또한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 또한 업장소멸을 시켜준 감사한 인연이라고 생각하여
그의 분노와 억울함을 동정할 줄 알고 감사로써 참회하는 것,
이것이 업장소멸하는 공덕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업장소멸하는 마음가짐과 행위를 우리는 공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공덕이란 우리들이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
거기에서 비롯되는 행위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란
단순하게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다 감사와 참회의 마음, 이것이 곁들여져야만 그 행위가 공덕이 되는 것이다.

 

과거에 지은 업을 소멸함에 있어서는

그 업이 찾아왔을 때 피하지 않고 받아서 소멸시켜야 한다는 것이 그 근본이며
그 이외에는 다른 방법은 없다.

 

그것을 잘 가르쳐 주는 말이 바로 부처님의 삼불능이다.
이것은 부처님도 할 수 없는 세 가지를 말하는데

첫째는 정해진 중생의 업장을 소멸시켜 줄 수 없으며,
둘째는 연이 없는 중생을 구원할 수 없으며,
세째는 삼계를 다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선 이것을 자세히 설명해 보면
첫째. 정해진 업장을 소멸시켜 줄 수 없다는 말은
배가 고픈 아들을 대신하여 어머니가 대신 밥을 먹어 줄 수 없고,
병든 아들을 대신하여 어머니가 병이 들 수 없듯이
업을 받는 중생을 대신하여 부처님이 업을 받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배고픈 아들을 대신하여 어머니가 밥을 먹어 줄 수 없지만
배고픈 아들을 대신하여 어머니는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여 주고,
병든 아들을 대신하여 어머니가 병이 들 수는 없지만
병든 아들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듯이

부처님도 업을 받는 중생을 대신하여 업을 받아 줄 수 없어도
업을 받는 중생과 항상 함께 하면서 그를 보살피는 것이다.

 

즉,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는 선업과 악업을 모두 가지고 태어났다.
그래서 선업을 받을 적에는 남들은 백배 천배 노력해야 할 일도
나는 힘을 들이지 않고서도 이룰 수 있는 것이고
악업을 받을 적에는 남들은 손쉽게 하는 일도
나는 백배 천배 노력을 해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즉 선업을 받을 때에는 행복이 찾아 오고
악업을 받을 때에는 불행이 찾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선업이든 악업이든 다 받아서 소멸시켜야 한다.

인생이란 선업이 끝났으면 악업이 찾아오고
악업이 끝나면 선업이 찾아오는 것이 인생이다.

 

-서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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