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지적인 면에서 18세기 어떤 성리학자보다 탁월했기에 일부 역사가들이 그를 개혁군주로 높이 평가하지만, 그의 이념적 성향은 결코 진보적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새로운 이념을 추구한 바 없으며, 정치 제도 또한 근본적인 혁신을 꾀한 적이 없다.
정조는 사실 조선 왕조의 오랜 국시(國是)인 성리학의 함양을 부르짖었고, 당시 새로운 기류를 형성하던 실용주의적 가치관으로 비롯된 문화적 혼란상을 극복하기위한 해결책을 성리학의 근본주의에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그 해결책의 대표적 사례가 바로 '문체반정'이다.
정조는 문체의 흥망성쇠는 정치현실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당시의 문체가 위미(萎靡)하여 근심스럽다고 하면서 문체에 크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정조는 육경을 진짜 고문이라고 하면서 그 정신을 이어받은 고문으로 글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조는 연암 일파의 문체를 못마땅히 여기고 문풍을 바로잡기 위해 새로운 문화정책을 펼쳤다.
규장각을 설치해 당시의 문운(文運)을 진작시키는 정책을 시행하도록 했고, 주자서를 비롯해 학문과 문학에 본보기가 될 만한 책들을 간행하는 한편 명청의 문집과 잡서 그리고 패관소설의 국내 유입을 금했다. 또 문체가 불순한 자는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했고, 남공철, 이상황, 김조순 등을 문체 불순으로 문책하여 자송문(自訟文)을 지어 바치도록 했다.
역대 어느 왕보다 자질이 뛰어났던 정조를 완고한 보수주의자로 여기는 것이 시대를 앞서가는 진보 성향의 왕이었을 거라는 통념을 깨야 하기에 이해하기 힘든 면도 있겠지만, 사실 그런 믿음은 잘못된 것이다.
실제로 정조의 통치이념은 결코 실험적이지 않았으며, 당시 외세에 의해 새로 도입되고 있는 종교나 사상에 대해서도 적대적이었다. 또한 화폐 통용에 관해서도 줄곧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균역법 같은 세제의 개혁조차 내심 반대하여 마지못해 실행에 옮겼을 뿐이다. 그는 오직 주자의 사상만을 정학으로 여기고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양명학은 물론 중국에서 나온 신간 서적의 수입도 엄금하였다.
정조의 뒤을 이은 아들 순조 역시 아버지와 같은 정책을 그대로 유지하여 마침내 중국의 새로운 서적은 물론 천주교, 양명학 그리고 정감록 같은 사상은 이단으로 여겨 점차적으로 선비들의 관심밖으로 사라져 갔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은 상층부의 양반이 아닌 최제우와 같은 시골 양반의 서자, 최시형으로 대표되는 평민이 대부분이었고, 양반은 기껏해야 김개남이나 전봉준 같은 시골 양반들이었다. 다시말해서 조선사회를 기성 체제에서 변혁시켜야 할 세력은 모두 체제의 외곽지대 혹은 바같으로 제한되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인한 19세기 이후 조선 사회의 근본적인 개혁은 정치적 역량이 부족한 평민들의 몫이었고, 따라서 정치 개혁은 실현된 가망이 없는 일이었다. 19세기 말에 전개된 독립협회운동이나 동학농민운동의 실패가 그러한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후로 위기의 조선사회에서 고종의 개화정책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이유가 바로 정조의 문체반정같은 이념적 경직화의 결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다시말해서 고종에게는 성리학이라는 오래된 정치이념에 사로잡힌 양반들을 움직일 정도의 정치적 힘이 너무도 부족한 것은 뻔히 들어나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당시의 조선의 왕들이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보수성향을 띨 때 였을 뿐이다. 홍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고 쇄국정책을 펼치는 것과 같은 현상유지를 바라는 정책은 외향적으론 반대가 있었을지언정 내심으론 기득권 세력인 양반들로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조선의 어떤 왕보다 두뇌가 명석했다는 정조는 역사의 갈림길에 위치해 있었다. 북학이나 실학이라든가 천주교와 서양의 새로운 과학기술을 적극 받아들여 체질 개선을 할 것인가 아니면 그러한 진보적인 싹을 자르고 성리학 지상주의를 표방하며 구시대의 가치를 수호할 것인가라는 역사적 선택의 길목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이러한 기로에서 현시대에서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체제 수호자의 길을 걸어버렸다. 이것은 바로 그가 처한 그 시대의 환경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이 조선 말기의 역사를 이루게 하였고 오늘 날에 있어서 우리에겐 너무도 아쉬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끝.
'야외활동 > 이것저곳'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계천 판잣집 (0) | 2012.02.19 |
---|---|
횡계 눈꽃 축제장 풍경 (0) | 2012.01.16 |
세계의 화약고(1) - 레바논 (0) | 2012.01.06 |
양수리 일출 (0) | 2011.12.18 |
한강야경 / 응봉산에서 (0) | 2011.1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