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수리 두물머리에서 바라보이는 운길산의 중턱에서 동북 방향으로 약 2㎞ 정도를 산 아래에 임진왜란 때 국난 극복에 혼신을 다 한 한음 이덕형(李德馨)이 만년에 은거하던 마을이 있습니다. 그 마을 이름은 북한강 가의 사제촌(莎堤村 ; 오늘날의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인데 흔히 ‘한음마을’로 불립니다. 사제촌은 두물머리에서 북한강 쪽으로 약간 올라와 위치한 용진나루가 있던 곳으로, 용진나루는 옛날 용진강으로 불리던 북한강의 북쪽 사제촌과 강의 남쪽인 양근군 중은동(오늘날의 양평군 양서면)을 이어주던 나루터였습니다.
그 마을을 찾아 들어서면 마을 입구에는 이덕형의 시를 새긴 비석이 있습니다.
“큰 잔에 가득 부어 취하도록 먹으면서
만고영웅(萬古英雄)을 손꼽아 헤어보니
아마도 유령(劉伶) 이백(李白)이 내 벗인가 하노라. “
명판에는 이덕형의 큰 포부를 헤아릴 수 있는 시 한 편이라고 설명도 깃들여 있습니다.
이덕형은 관직에 있을 때에도 틈틈이 고향마을 인근에 있는 아름다운 운길산을 찾았고 수종사의 주지 덕인스님과 친분을 갖고 따뜻한 정을 나누며 시를 주고받기도 했습니다.
이때의 시 한 편에는
“운길산 스님이 사립문을 두드리네.
앞개울 얼어붙고 온 산은 백설인데,
만첩청산에 쌍련대(雙練帶) 매었네.
늘그막의 한가로움을 누려봄 즉 하건마는”
이라 읊었습니다.
이덕형의 인품은 한 시대를 대표할 만합니다. 사계 김장생은 이덕형의 인간됨을 평하기를 “한음은 치우침이 없고 당(黨)이 없는 동서남북의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덕형의 인품은 이미 조정 내외에 두루 알려져 있었습니다. 정경세의 『우복집』에는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를 지닌 한음의 일화를 전하고 있습니다.
“한음은 평소에 겸손하고 삼가며 자신을 자랑하는 빛이 없었다. 그는 서총대(瑞蔥臺)에서 임금이 적은 글에 응대하는 글짓기에서 1등을 하였다. 아무도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왕이 문신들에게 명하여 정시(庭試)를 보게 하였는데, 여러 벼슬아치들은 ‘이번의 정시에도 역시 한음이 1등으로 급제를 할 거야’라고 수군거렸다. 한음은 이 말을 듣고는 병을 핑계 대고 정시에 응하지 않았다.”
이덕형은 고려 공민왕 때 신돈을 탄핵하다 실각한 광주(廣州)이 씨 둔촌 이집(遁村 李集)의 후예이며, 성종 때의 대신 이극균의 5세손입니다. 그리고 이덕형은 이항복과 함께 흔히 “오성과 한음‘으로 회자되고 있는데, 오성은 도원수 권율의 사위가 되고 한음은 영의정 이산해의 사위가 되어 중앙의 요직에 있으면서도 교만하지 않았고 국가의 위기 시에는 힘을 모아 난국을 풀어나갔습니다. 특히 이덕형은 외교적 능력이 출중하여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군사원조를 이끌어내기 위해 직접 명에 들어갔고, 협상파로서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었던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그의 인품을 알아보고 직접 만나 회견하기를 요청해오기도 하였습니다.
이덕형은 31세의 젊은 나이에 대제학을, 38세에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하고 42세에 영의정에 오르는 등 30여 년의 관직생활 동안 영의정을 3번, 문형을 3번 지낼 정도로 능력과 인품 그리고 덕망에 있어서 출중한 인물이었으며 무엇보다도 백성을 사랑한 관리였습니다.
그러나 선조가 서거하고 광해군 정권의 대북파 실세 이이첨이 권력을 전횡하자 미련 없이 관직을 버리고 이곳 사제촌에 별서를 마련하여 죽을 때까지 부모를 모시며 은거생활로 일관하였습니다. 그는 특히 가사문학의 대가였던 경상도 영천 출신의 노계 박인로(朴仁老)와 친하게 지내면서 많은 시문을 주고받았습니다. 박인로는 무과출신의 무관이었지만 시와 가사에 대한 탁월한 재능을 지닌 문인이기도 했습니다.
이덕형은 광해군 정권이 폐모론을 내어놓자 미련 없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 사제촌 마을로 들어와 조용히 여생을 마쳤습니다. 박인로는 누구보다도 한음의 심사를 가장 잘 꿰뚫어 본 듯합니다. 한음이 퇴직하여 한적한 시골에 살면서도 마음속으로는 흔들리는 조정을 바로 잡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노계는 가사에서 구구절절이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제촌(송촌) 마을입구에서 안쪽으로 200여 미터 산 쪽으로 올라가자 이덕형이 은거했던 별서지가 있습니다. 본래는 대아당이라는 당호의 고택과 읍수정, 이과정이라는 2개의 정자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지고 그 터만 남아있고, 그 자리에 새로 지은 읍수정이 있습니다. 고가가 있던 자리에는 그 당시 한음이 손수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고목이 된 채 서 있었고, 고목 은행나무 옆에는 타고 다니던 말을 새워두던 하마석 조형물을 세우고 한음의 별서지(別墅地)였음을 알리는 안내판을 세워두고 있습니다. 사제촌에서 여생을 보낸 한음은 죽어서 그의 출생지인 강 건너 청계산 중턱에 묻혔습니다.
라이딩 시간 / 날씨 / 풍속 ;
2025년 03월 07일 금요일 오전 10시 14분 40초 - 오후 15시 07분 42초 (4시간 53분 02초)
맑음 (섭씨 7도~ 10도) / 북풍 1m~2m/sec
라이딩 코스 / 운행 거리 및 시간 / 평균속도 / 상승고도 ;
별내동(출발) - 용암천 - 사로잠수교(왕숙천) - 진관산업단지 - 다산중앙공원 전망대 - 일패근린공원 - 홍릉천 - 한강삼패공원 자작나무숲 길 - 팔당대교 - 팔당댐(봉안터널) - (옛) 능내역 - 점심식사(조안리 한강밥집) - 운길산역 - 조안면 보건소 - 남양주 송촌초교 - 한음 이덕형 사적지 - 북한강 자전거 길 - 금남리 마을길 - 금남저수지 - 메타스퀘어길 - 마석역 - 천마산역(종료)
57.79Km / 3시간 36분 46초 ( 1시간 17분 16초 휴식 및 점심시간 별도 ) / 16Km/h 541m
라이딩 지도 ; 지도를 크게 보려면 마우스 클릭하고 오른쪽마우스로 새 탭 이미지 열기에서 확대(+)
GPX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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