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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특수 정보부대 - 체탐인

우둥불 2020. 11. 9. 18:32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전쟁은 전투에서 이기면 전쟁에서 승리하여 만족할 만한 앞 날을 열어주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지만, 이것은 실제적인 사실이 아니라 미디어가 사람들에게 전쟁의 승리를 흥미롭게 보여줘서 영상을 팔아먹기 위한 전쟁의 가장 잘못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승리는 반드시 평화와 영광만이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쟁을 치른 당사자들은 전쟁이란 파괴행위로 인한 그만한 댓가를 치뤄야합니다. 그렇기에 국가나 사회적으로 또 다른 문제점을 야기시키거나 그렇기에 재탕의 전쟁을 다시 일으킬 가능성을 높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전쟁을 치뤄 이기기 위한 알짜 속살을 들여다보면, 전투는 보급망과 통신망은 물론 정찰력과 정보력이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아군이 잘 싸울 수 있도록 무기와 식량은 물론 아군끼리 서로의 위치와 상황을 동시적으로 알 수 있는 통신망이 원활해야 하며, 적의 동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대책을 세울 수 있게 만드는 정보력은 전쟁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1392년에 건국한 조선은 그 당시에 국경이란 경계선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북쪽으로는 여진족에게, 남쪽에는 바다건너 왜구의 빈번한 침입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대마도를 정벌해서 왜구는 어느 정도 침입에 대한 억제를 시켰고, 북쪽의 압록강과 두만강에는 4군 6진을 설치하여 여진족의 침입을 막으려 하였지만, 오히려 국경의 경계선이 모호하게 살고 있던 여진족의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결국 생활터전을 빼았겼다고 판단한 여진족은 오히려 조선에 더욱 빈번하게 침입해 와서 약탈과 습격을 하였습니다. 여진족은 말을 타고 재빠르게 쳐들어와 백성들을 죽이거나 사로잡아가는 일은 물론 식량과 물자들을 약탈하는 것이 빈번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반면에 조선군은 여진족에 게릴라식 침입을 감당하기에는 방어해야 할 지역이 넓고 병력이 적어서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때 조선의 조정에서는 이를 대응하기 위하여 체탐인이라는 정보부대원을 구성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서 여진족의 본거지까지 진출하여 그들의 동태를 살피는 일을 하였습니다. 

 

 



세종 19년 6월 11일자 실록에 이러한 체탐인의 활약과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기록이 있습니다. 

여진족을 정탐하려 갔던 체탐인이 여진족에게 들키는 바람에 활을 이용한 교전이 벌어져 퇴각하는 중에 1명이 실종되었는데, 적에게 잡혀 사망한 것이 아니라 깊은 산중에서 맹수들의 습격을 받거나 험난한 지형에서 사고사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는 기록이었습니다. 

따라서 세종은 이러한 체탐인에게 포상을 하거나 활동을 지나치게 하는 것을 자제하라는 등의 지시를 내리는 관심을 보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특수 정보원인 체탐인은 국경지역에 배치된 군인 중에 용감하고 배짱이 좋은 병사들로 뽑았습니다. 이들은 보통 5~9명 정도가 한 팀을 이루었는데, 워낙 위험한 일이어서 인명피해가 적지 않게 발생했다고 합니다. 

체탐인의 임무는 여진족의 동태를 살피는 것으로 여진족은 평소에는 부족별로 나뉘어 농사와 유목을 주로 하다가 식량이 떨어져 살기가 힘들어 지면 뭉쳐서 약탈로 그 부족함을 메꾸었기 때문에, 체탐인은 그들의 본거지로 잠입해서 정탐하여 그러한 상황을 재빠르게 캐어내는 것이 중요한 임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조선으로서는 여진족에서 유능한 지도자가 나타나 뭉쳐지는 것을 반가워하지 않는 것이었는데, 당시에 여진족은 이만주라는 지도자가 여진족을 규합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과 명나라는 번갈아 가면서 군대를 출동시켜 여진족의 본거지를 예방차원에서 쑥대밭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세종은 두 차례의 걸쳐 이들의 본거지를 정벌하여 이만주의 세력을 꺽었는데, 이때 체탐인들이 투입되어 활발하게 활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체탐인들은 위험하면서도 중요한 임무를 하였지만, 워낙 비밀스러운 일을 한 탓에 실록에는 아주 작은 기록만 남아있는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