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초는 파초과 파초 속의 여러해살이풀로서 바나나와 같은 속의 속하는 식물입니다.
정조필 파초도(正祖筆 芭蕉圖)는 그러한 파초를 조선의 22대 왕 정조가 자신의 재위 기간 중에 그린 그림으로서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대한민국 보물 제743호입니다. 이는 보물 제744호인 정조필 국화도(正祖筆 菊花圖)와 함께 쌍폭에 해당됩니다.
구체적으로 이 파초도(芭蕉圖)는 바위 옆에 서 있는 한 그루의 파초를 묘사한 그림으로, 그림이 비교적 단순한 주제를 다루었지만, 균형 잡힌 포치(布置)와 은은히 풍기는 문자향(文字香) 그리고 농담을 달리 한 세련된 묵법(墨法) 등이 돋보여 남종 문인화의 높은 경지를 드러낸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기법적인 측면에서도 대단히 세련된 면모를 보여준다고 여깁니다. 특히 먹의 농담과 흑백 대조에 의하여 바위의 괴량감과 질감 및 파초잎의 변화감을 잘 표현하였고, 또한 농담을 달리하여 파초잎을 대강 나타낸 뒤 잎 가장자리에 꼬불꼬불한 선들을 덧대듯이 구사하여 마무리 지은 기법도 몰골법(沒骨法)의 동체(胴體)와 함께 주목됩니다. 그리고 틀에 매이지 않은 방법으로 표현된 이 파초도는 서화와 학문을 사랑한 정조의 면모와 남종화의 세계를 잘 드러낸다고 볼 수 있는 조선 시대 왕의 작품으로서는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라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조가 이러한 파초, 국화, 매화 등을 소재로 한 그림을 남기긴 하였지만, 실제로는 화초에 뜻을 둔 적이 없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왕이 사사로운 것에 마음을 빼앗겨 큰 뜻을 상하게 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더욱이 정조가 왕위에 오른 뒤에는 한 때는 화훼와 관련된 공물(貢物)제도를 없애려까지 했다고 합니다만 그렇지만 당시 화훼 농민의 삶을 생각해서 형식만은 그대로 유지한다는 뜻으로 가을의 국화와 여름에는 석류를 궁궐 내에 사두게 하였다고 합니다. 특히 석류는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워서가 아니라 꽃 피고 열매가 맺고 익은 절후 시기가 벼농사와 부합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는 인간 이산(李祘)이 자신의 취향이나 정서가 우선이 아니라 정조라는 나라의 군주로서 공적인 면을 우선시 한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판단할 수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정조가 화초에 뜻을 두지는 않았었지만, 그러한 화초를 대상으로 하는 영물시(詠物詩)를 짓기는 즐겨했다고 합니다. 특히 경사 때나 출행(出行) 중에 잠시 쉴 때마다 시를 읊고 신하들에게 화답하게 할 정도로 그러한 시 짓기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다음은 정조가 세손 시절에 춘저(春邸)에 머물고 있을 때 지은 "섬돌의 파초(계초, 階蕉)라는 시입니다.
庭苑媚春蕪 정원미춘무 정원에 봄풀이 아름다운데
綠蕉新葉展 녹초신엽전 푸른 파초는 새로운 잎을 펼쳤다
展來如箒長 전래여추장 앞으로 펼치니 비만큼 길어지니
托物大人勉 탁물대인면 사물에 의탁하여 대인이 되는데 힘을 써야겠다 己丑년(1769, 정조)
시에서 정조는 파초에게서 대인(大人) 군주의 덕을 발견하고 자신을 스스로 경계하고 훈계하는 말로 이 시를 끝맺음을 하고 있습니다. 즉, 파초의 생태적 속성을 자기 수양의 방편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러한 대인은 할아버지 영조를 비롯해서 주변의 사람들이 어린 세손에게 요구했던 군주의 모습이기도 하였습니다.
파초는 자랄 때 새로운 심이 같은 곳에서만 나와 활짝 펼치고 다시 돌돌 말린 새잎이 돋아나 앞서 펼쳐진 잎의 뒤를 따릅니다. 새심으로 새로운 덕을 기르고, 이내 새잎으로써 새로운 세상을 펼치는 형국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정조가 파초를 그림 주제로 삼은 것은 맑은 기색에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는 그 모습이 대인과 군주의 덕성과 비슷해 좋아하기를 멈출 수 없던 까닭이었고, 오랜 시간을 통해 일반화된 인문적 해석과 유교 성현들의 행적과 관련된 상징성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었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이러한 정조필 파초도의 제작시기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만기(萬機)라는 주문 방인의 뜻을 새겨 볼 때 왕위에 오른 후에 그린 그림이 아닌가 하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파초도와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묵매도'에 찍힌 만기여가(萬機餘暇)라는 주문 방인도 '파초도' 제작 시기를 가늠하는데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는데, 여기에 '만기여가'라는 의미는 왕이 막중한 직무를 수행하면서 잠시 틈을 내서 여가를 즐긴다는 뜻입니다.
정조가 이러한 파초를 그린 것은 파초 그 자체가 아름다워서가 아니고 더구나 그림 솜씨를 자랑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대인의 품격과 군주의 덕성을 지닌 파초가 군사(君師), 개혁 군주를 지향하는 자신의 공적 자아를 위탁할 수 있는 이상적인 소재가 아니었던가 하고 추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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