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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활동/이것저곳

인왕산의 국사당과 선바위

by 우둥불 2021. 12. 9.


조선시대에서 인왕산은 한양 땅에서도 도성을 바로 내려다볼 수 있는 조망지였고, 그런 상태에서 왕의 기운이 내려지는 곳이라 여겨졌으며, 그리고 불교와 무속이 뒤섞인 종교의 성지이면서 조선 문인들의 창작터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사람들은 이러한 인왕산을 중심으로 정치, 종교, 문화의 성쇠(成衰)가 오고 갔는데, 이렇게 사람의 필요에 따라 생성되고 발전했던 인왕산은 그곳에서 인왕산의 무속 문화인 국사당의 무신도와 선바위를 대표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왕의 기운이 깃들고 조선 문인 문화의 중심지로서 인왕산

 

 

 

선바위에서 바라본 인왕산 줄기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태조 이성계는 북악산을 중심으로 경복궁을 건립하고, 남쪽에는 남산, 동쪽에는 낙산과 더불어 서쪽에 위치한 인왕산을 내사산(內四山)중 하나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인왕산은 다른 내사산보다 조선의 궁궐이 한눈에 내려다보여 그 인근에는 왕실 일원들은 물론 사림(士林)의 거주지와 모임터가 많았으며, 특히 중종과 선조의 잠저(潛邸 ; 왕이 즉위하기 전 사저)가 있어 풍수지리적으로 왕의 기운이 깃든 곳으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리고 인왕산은 도성이 가까운 곳에서도 기암 암석과 함께 풍광이 뛰어나 조선의 문인들이 아회(雅會), 문회(文會), 시회(詩會)등으로 모인 곳으로써 조선 문인 문화의 중심지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조선 후기 위항문인(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인 출신 문인)들은 그들의 집거지인 인왕산 서촌 옥인동 송석원(松石園) 등에서 시문 서화를 제작하고 즐기면서 그곳을 그들의 모임터로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인왕산을 주제로 하여 겸재 정선은 "인왕산 제색도", "인곡유거도" 등의 명작을 남겼으며, 김홍도는 송석원의 시화 광경을 "송석원시사야연도(松石園詩社夜宴圖)라는 작품으로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무속과 합류된 불교의 성지로서의 인왕산

인왕산은 그러한 조선 문인들의 모임터이기 이전에 이미 한양 땅의 토착 종교인 무속과 합류된 불교의 성지이기도 하였는데,  본래의 인왕산의 이름인 '인왕(仁王)'은 불교에서 의미하는 금강역사(金剛力士)라는 뜻으로 사찰 입구에 서있는 수호신입니다. 따라서 이와 관련해서 인왕산은 방위신인 좌청룡으로 서쪽에서 조선 왕실을 지켜주는 수문장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기며, 이러한 '인왕산'은 인왕사(仁王寺)를 비롯하여, 선승들의 수도처인 금강굴(金剛窟), 세조 때 지은 복세암(福世庵), 궁중의 내불당(內佛堂)등  도성의 내사산 중에서도 사찰이 가장 많았던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추세는 현재까지도 선바위와 국사당을 중심으로 하는 인왕사 주변의 건물들이 거의 모두가 사찰인 것과 연관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오늘날에도 이곳을 이른바 '절 마을'로 불리기도 합니다. 

 

 

 

절마을로 들어서는 인왕사 일주문

 

 

국사당으로 오르는 계단길 - 주변에 보이는 건물이 거의 모두 사찰입니다.

 


전국의 많은 곳에서 '선바위'라는 지명은 보통 서 있는 바위 '입석(立石)'을 뜻하지만, 인왕산 선바위는 뒤나 옆에서 보면 스님이 장삼(長衫)을 입고 있는 형상이라고 해서 참선(고요)할 '선(禪)'자를 써서 선암(禪巖)으로 쓰입니다.

 

이곳은 오래전부터 기이한 암석으로 정령이 있다고 믿는 일반인들의 민간신앙터였지만,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기도를 하였기 때문에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다는 설화로 하여 두 개의 큰 바위는 무학대사와 이성계 또는 이성계 부부 바위라고 현재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옆에서 바라본 선바위

 

 

뒤에서 바라본 선바위

 

 

그리고 태조 이성계는 한양의 도성 경계에 대하여 선바위가 도성 안에 들어가도록 성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무학대사와 선바위를 경계로 안쪽으로 성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정도전의 대립으로 고민을 하였는데, 이성계는 당시로서는 고려시대라는 구 시대의 이념이었던 불교보다는 조선이라는 새 시대 새 나라를 여는 국가이념으로서 유교를 선택하였기에 결과적으로 무학대사의 뜻이 좌절되고 정도전의 주장이 관철되었는데, 이때 무학대사는 "이제 중이 선비의 보따리나 짊어지고 다니게 되었다"라며 탄식하였다고 전해 오기도 합니다. 이렇게 전해오는 이야기는 곧 그 당시의 불교와 유교의 대립으로 해석할 수 있고, 결국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에서 유교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의 시대를 예고하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앞에서 소개했듯이 민간설화에서의 선바위는 '인간이 죽어서 석불(石佛)이 된 것'이라 믿으며, 이 바위에서 소원을 빌면 소원성취를 할 수 있다고 하여 일찍이 이전부터 신앙의 대상이었습니다.   

 

 

 

선바위에서 바라본 국사당과 산능선 상에 서울 성곽의 모습 - 성곽 너머가 도성 안쪽입니다.

 



인왕산 국사당의 무신도(巫神圖)  

 

 

국사당 - 현재 국사당은 코로나로 인하여 출입을 금하고 있습니다.



인왕산의 국사당은 본래는 남산 꼭대기에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 연혁은 남산과 관련된 신앙의 역사에서부터 찾을 수가 있는데,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남산을 목멱 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호국의 신으로 삼아 개인적인 제사를 금하고, 국가의 공식행사로 기우제(祈雨祭)와 기청제(祈晴祭 ; 태종 8년 5월, 9년 7월)를 지냈다고 하며, 아울러 신주(神主)가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당초에는 국사당이 아니라 목멱신사라는 명칭의 사당이 남산 꼭대기에 있었고, 매년 봄, 가을에 초제(醮祭 ; 별을 향하여 지내는 제사)를 지냈다고 전하여집니다.

 

따라서 국사당이라는 명칭과 무신도(巫神圖)에 대한 언급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藁)"에서 비로소 볼 수 있는데, 거기에 언급되어 있는 것이 현재 국사당의 전신이라 합니다.

 

1972년 당시 국사당 관리인의 증언에 의하면, 조선시대 말엽부터는 이미 국가적인 제사를 지내는 일이 거의 없었고, 다만 별궁(別宮)의 나인들이 치성을 드리러 오거나 또는 개성 덕물산(德物山 ; 만신의 조종(祖宗)으로 간주되는 산)에 치성을 드리러 가는 사람들이 먼저 이 당을 거쳐 가곤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민중전(閔中殿 ; 명성황후)이 궁중 나인들을 시켜 국사당에 치성을 드리게 하였다는 사실은 궁중 발기(撥記)의 기록으로도 뒷받침되는데, 궁중 발기에는 인근 각처의 명산과 당, 묘 등에 치성을 위하여 보낸 금품 목록이 적혀 있어, 여기에 국사당 이름이 여러 번 등장한다고 합니다.

 

그러한 국사당이 1925년에 남산 꼭대기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는데, 이것은 일본인들이 남산 기슭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이보다 더 높은 곳에 국사당이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이전을 강요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전 장소를 이곳 인왕산으로 택한 것은 그곳이 태조와 무학대사(無學大師)가 기도하던 자리였기 때문이라 하며, 국사당의 '국사'는 본래가 천신(天神)의 하강터인 '마루'를 의미하는데, 무학대사를 '임금의 스승'으로 인식하여 이러한 것을 국사당의 의미와 성격으로 나타내었던 것 같습니다.

 

한편, 인왕산의 '仁王'은 금강역사인 불교용어라서 조선의 사대부들이 이러한 임금 '王'자 대신 성할 '旺'자로 하여 '仁旺山'이라 표기를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국사당이 무신당으로서 굿을 행하는 곳이니 바로 옆에 있는 선바위와 복합적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었는데, 국사당의 내부에는 무속신앙의 신을 그린 무신도(巫神圖) 18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국사당의 무신도'로서 국가 민속문화재 17호로서 태조 이성계와 강씨 부인, 그리고 호구아씨, 용왕대신(龍王大神), 산신(山神), 창부씨(昌夫氏), 신장(神將)님, 무학대사, 곽곽선생, 단군, 삼불제석(三佛帝釋), 나옹대사(懶翁大師), 칠성신(七星神), 군웅대신(軍雄大神), 금성신(錦聖神), 민중전(閔中殿 ; 명성황후), 최영(崔瑩)장군 등이며, 양쪽 협칸에는 각각 4점과 6점의 무신도가 걸려있어 총 28개의 무신도가 있다고 합니다. 또한 명도(明圖)란 이름의 명두(明斗) 7점이 무신도 사이에 걸려 있는데, 명두란 무녀를 계승할 때 넘겨주는 일종의 증표로 큰 무당이 자신을 이을 사람을 선정해 그 상징물로 명도를 주고 이것을 받은 무녀는 자신의 수호신처럼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 명두는 놋쇠로 만든 것으로 청동기시대 제천의식(祭天儀式)에 쓰인 도구들의 원형으로 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태조 이성계 부부상과 고려의 국사인 나옹화상, 그리고 조선의 국사인 무학대사의 복식은 그들의 성격에 맞게 묘사되어 있으며, 태조상과 더불어 가장 강력한 효험을 지닌 신으로 알려진 최영 장군상도 무속의 성지 개성 덕물산 최영 장군당의 최영상을 모티브로 삼아 고려 말 무신(武臣)의 복장과 기물을 표현하여 모셔져 있습니다. 이들은 살아생전에 정치적으로 대립했던 인물들인데, 최영의 목숨을 앗아간 이성계는 한나라를 건국한 왕으로 숭배되고, 그에게 목숨을 잃은 최영은 고려의 영웅이자 최고의 장군신으로 각각 긍정적인 면모를 부각해 나란히 모셔져 있는 것이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인왕산은 뛰어난 풍광과 지리적 환경으로 인하여 조선 왕실과 국왕을 보필하는 인격화된 산이 되었고, 기이한 형태로 하여 영험함이 부여된 선바위는 온갖 고난과 역경에 처한 백성을 위로하는 그들의 의지처가 되었던 셈입니다.

 

이러한 것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인간은 불변하는 자연물에 신격화된 의미를 부여하여 믿음의 대상과 공간을 특정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변화와 관련된 인문환경을 따랐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합니다. 끝.   

   

* 이 글은 문화재청 발간 '문화재 사랑' 책자 중에 강영주님의 글을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