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부터 수 없이 전해지는 옛 경전은 어떻게 전해져 왔을까요?
활자를 사용하던 시대는 활자로 찍은 판본이 있겠지만, 활자 이전이나 혹은 그 이후라도 많은 경전이 사람의 손으로 쓰였는데, 그것은 왜일까요?
그것은 바로 ‘정성’인데, 편지도 손 편지로 쓰면 더 정성스럽게 보이는 것처럼, 한 글자, 한 글자 손으로 적어 내려가는 것은 그 정성을 다하는 가장 분명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옛 선조들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던 ‘불경’을 옮겨 적는 일이기에 이 방법이 발달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사경(寫經)’이라 부릅니다.
사경은 경전을 필사하는 것으로 불교의 전래 및 전파와 직결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불교가 성행했던 고려시대에 사경이 전성기를 맞이한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경은 불교가 전해지는 삼국시대 무렵에도 행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불교가 당시 정치와 문화의 기반이 되었기 때문에 국가 차원에서 불교를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하기위하여 경전을 사성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러므로 초기에 사경작업은 아무래도 불교 교리에 익숙하면서 글의 능숙했던 승려들이 그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라 추정하게 됩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통일신라시대 명필로 알려진 김생이 사경을 많이 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화엄불국사사적>에는 당시 왕후장상, 명필, 승려들이 사경을 많이 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사경제작에 참여한 이들의 신분을 통하여 사경 행위가 어떤 의미가 지녔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을 겁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불교경전 수요가 일부 계층에 국한되지 않고 크게 늘어났는데, 이는 인쇄술의 발달을 불러왔으며, 8세기 중엽부터는 널리 보급된 목판 인쇄술이 사경을 대신했습니다. 그러나 사경은 단순히 불교 경전을 보급하는 필사 수단이 아니라 개인적인 공덕을 세우는 것으로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신라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경으로 신라 경덕왕 13년(754년)에 연기법사가 간행을 시작해 그 이듬해인 755년에 완성된 것입니다. 이 사경의 발문 조성기에는 사경을 만드는 일에 참여한 19명의 인물에 관하여 자세히 적혀 있으며, 사경 제작 방법과 그에 따른 의식절차를 적은 간행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특히 지작인과 경필사, 화사, 경심을 만든 사람, 경의 제목을 쓴 사람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사경이 분업 방식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사경은 실용성보다 신앙적인 면이 강조된 장식경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특히 초기에는 금니, 은니 사경이 주로 사찰에서 사성되었는데, 명종 11년(1181년)에 이르러서는 국가적 차원의 지원을 받는 사경원이 설치되었습니다. 이는 사경 제작이 독립적인 국가 기구에서 이루어졌음을 의미하며, 매우 전문적인 성격을 지녔음을 알게 합니다.
고려 충렬왕 이후에는 금니, 은니 사경 사성기법이 절정기에 이르렀으며, 100명의 사경승이 원나라에 파견되어 중국의 금니, 은니 사경 대장경을 사성해 주고 돌아오는 한편, 원나라에서 고려에 감독관을 보내어 대장경을 사성해 가져가기도 했습니다. 이때 원나라는 금니, 은니 사경의 바탕지인 고려정지를 요구하기도 했고, 환자 방신우를 보내자 고려왕이 사경승과 경필사 300인을 모아서 대장경을 사경하도록 했다는 기록도 있어 당시의 금니, 은니 사경 사성 수준과 국가적 차원의 지원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국왕을 위시한 왕비, 대군, 군, 공주, 옹주, 여러 빈이 국시에 위배됨을 알면서도 사적으로 불전에 속죄하거나 공덕을 쌓기 위해서 혹은 수복을 기원하거나 죽은 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경을 간행하고 사경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사경 관련 전담기관이 없었으므로 글씨에 뛰어난 문신이나 승려가 사경에 참가했으며 금니, 은니 사경의 제작은 줄어들고 주로 백지에 묵서로 사경이 서사되었습니다.
조선 초기에 태조가 승하하자 태종이 그를 추도하기 위하여 서천군 한상경, 영조참의 이규 등 7인으로 하여금 <금니묘법연화경>을 사성하게 하였고, 세종 역시 당시 사경 서체 구사의 대표적인 인물인 성달생에게 사경의 제작을 권유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세조는 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금강경>과 <반야경>을 손수 사경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세종 7년(1425년)에는 <법화경>을 금과 은으로 쓴 사경승 성준을 금령위반으로 보고된 기록이 있어 이 시기 존재했던 전문 사경승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후로 사경승은 조선 중기를 거쳐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가 조선 말기인 1880년(고종17년) 고종의 비 명성황후의 발원으로 <금니법화경>을 서사한 기록에서 사경승인 원기가 등장합니다. 그 외에도 1896년 선암사에서 <화엄경> 사경을 시작하여 6년 만에 완성했다는 사경승 원기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권말의 사성기에 의해 삼중대광 영인군(寧仁君) 이야선불화가 일문권속의 수복과 평안을 빌기 위해 제작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사〉 백관지에 의하면 충선왕(忠宣王) 때 정1품을 삼중대광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하고, 또한 지워진 사성연대의 머리에 '지'(至)자가 보이므로 지정연간(1341~67)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때 금강경·장수경·미타경·부모은중경 등이 함께 사성되었습니다.
변상도의 왼쪽에는 여래삼존과 제불을, 오른쪽에는 보현과 제보살을 그렸는데 보현의 앞에는 선재동자가 있고, 여래와 보현의 의습이 선묘로 표현되었는데, 무릎 있는 데가 과형으로 표현된 점은 충렬왕대의 〈묘법연화경 妙法蓮花經〉 변상도 기법을 따른 것입니다. 변상도 뒷면의 기록을 통해 문향이 그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에 전래되었다가 되돌아온 것으로 현존하는 사경의 변상도 가운데 가장 우수할 뿐만 아니라 작가를 알 수 있어 이 방면의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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