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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활동/자전거 도로 라이딩

부산/경남 라이딩 (4일차) - 가야산 해인사 등

by 우둥불 2020. 1. 21.

 

라이딩 코스 ;

 

합천 숙소 - 마령재(약320m) - 야로면 - 가야면 - 해인사(약610m) - 가야면 - 산재현(약530m) - 거창버스터미널 (약 75Km)

 

 

 

 

라이딩 지도 - PC에서는 사진이나 지도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음

 

 

 

 

 

마령재(320m)에서 인증샷  

 

 

합천에서 해인사 방향으로 합천천을 따르다가 개천은 북서쪽의 장계저수지방향으로 향하고 도로는 그대로 북진을 하는데, 그 앞에는 지리상으로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가로지르며 막고 있는 산줄기인 수도지맥이 있으며, 이 지맥을 넘는 고갯길이 바로 마령재이다. 연속 이어지는 4일차의 라이딩에서 체력적으로 피곤해진 상태여서 그런지 업힐 하나하나가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는데 숙소에서 출발한지 30분도 채 안되어서 맞이하는 업힐이 힘들게 한다......^^

 

  

 

 

마령재 정상부근 전망대 데크에서

 

 

 

 

 

전망대에서 바라본 합천지대의 아침 정경

 

 

 

 

 

마령재 넘어서 합천에서 해인사로 향하는 도로 

 

 

 

 

 

야로면을 지나면서 마침내 저 멀리 가야산 줄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가야산 해인사

 

 

법보사찰인 해인사는 예로부터 비중이 컷던 모양이다. 통일 후의 신라 사회를 지탱한 이데올로기가 화엄사상이었으며, 화엄교학으로 무장한 화엄종 승려들이 이데올로그들이었는데, 그러한 화엄사상을 생산하고 전파하는 연구소, 혹은 전진기지가 화엄종 사찰이었으며, 그 선두에 열 군데의 화엄종 사찰인 화엄십찰(華嚴十刹)이 있었는데, 해인사는 그러한 화엄십찰 가운데 하나로 창건되었다.

 

화엄십찰은 의상대사 혹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세워졌는데, 화엄종을 확립한 인물이 의상대사였으며 그의 제자들에 의해 화엄사상이 신라 사회 전체로 확산, 파급되었다. 해인사의 창건주가 순응(順應)스님으로 의상스님의 손제자(孫弟子)가 된다. 즉, 의상대사의 10대 제자 중에 한 사람인 신림(神琳)스님이 그의 스승인 까닭이다. 해인사는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802)에 처음 만들어졌으며 대를 넘겨서 이정화상(利貞和尙)에 의해 마무리되어 건립되었다.

 

해인이라는 뜻은 화엄종의 근본경전인 화엄경, 곧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에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말이 나온다. 이 화엄경의 세계관은 일심법계(一心法界)로 요약된다. 온갖 세속의 것들이 깨끗이 사라져서 지혜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가 일심법계이다. 그 세계는 객관적 사실의 세계, 영원한 진리의 세계이다. 그러한 세계는 모든 번뇌가 다한 바른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세계를 뜻하는 것인데, 깨달음의 눈인 부처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가 바로 일심법계이다. 일심법계에는 물질적 유기세계(有機世界)인 기세간(器世間)과 중생들의 세계인 중생세간(衆生世間), 바른 깨달음에 의한 지혜의 세계인 지정각세간(知情覺世間)이 있는 그대로 다 나타난다.

 

마치 거센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잔잔해져 바다가 고요해지면 거기에 우주의 만 가지 모습이 남김없이 드러나듯이. 이러한 경지가 곧 해인삼매라는 것이다. 우리들의 마음의 바다에서는 번뇌라는 가지가지의 물결이 일고 있는 어리석음이라는 바람이 불고, 그 어리석음의 바람이 잦아들고 번뇌의 물결이 잠잠해지면 지혜의 바다(海)에 도장(印)을 찍듯이 무량한 시간, 무한한 공간에 있는 일체의 모든 것이 본래의 참모습으로 발현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해인삼매이자 부처가 이룬 깨달음의 내용이며, 우리들이 돌아가야 할 참된 근원이고, 본래 모습이라고 한다. 여기서 해인사라는 절 이름이 바로 이 말에서 따온 것이니, 말하자면 화엄경의 내용을 압축해서 드러내는 이름인 셈이다. 

 

해인사는 조선조에 들어 서면서 내리막길을 걷는 불교시대 속에서도 왕실의 비호 속에 온존하게 유지되다가 성종대에 들어서 1488년 인수(仁粹, 덕종으로 추존된 세조의 맏아들 장(暲)의 비), 인혜(仁惠, 세조의 둘째아들 예종의 계비) 두 왕대비가 세조비 정희왕후의 유명(遺命)을 받들어 당대의 고승 학조스님으로 하여금 해인사를 대대적으로 중창케 하여 1490년에 공사를 마쳤다. 

이때 세워진 각종 건물의 총 칸수가 160칸이었으니, 아마도 성종대의 중창으로 오늘날 우리가 보는 해인사의 틀이 잡혔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이때의 모습은 안타갑게도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임진왜란 때도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던 해인사는  1695년부터 1871년까지 176년 사이에 짧게는 1년, 길게는 수십 년의 간격으로 무려 일곱 차례나 크고 작은 화재가 발생하여 여러 번 제 모습을 바꾸었다. 그 가운데 1817년의 대화재는 천여 칸의 건물을 불태웠다고 한다. 그때 마침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선생의 아버지 김노경(金魯敬)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었던 관계로 해인사의 중창을 후원하게 되고, 또 그것이 인연이 되어 김정희는 그의 나이 33세가 되는 1818년 가야산해인사중건상량문(伽倻山海印寺重建上樑文)을 쓰게 된다.

 

가로 4.85m 세로 0.94m의 감색 비단에 금니(金泥)로 쓴 이 거대한 상량문은 해인사의 소중한 보배로 지금도 남아 있다. 이것은 절이 불에 타지 않았다면 아예 있지도 않았을 테니 기념비적 가치와 아울러 하루아침에 해인사를 잿더미로 만든 안타까운 역사를 상기시키는 유물이라 여길 수 있을 것 같다. 아무튼 이때의 복구는 이전 모습보다 대폭 축소된 형태로 이루어졌고, 그때의 모습이 부분적인 변화를 거치면서 오늘 날에 이렀다고 본다.

 

 

 

 

 

 

 

 

 

 

 

 

팔만대장경을 소장 중인 장경각의 출입문

 

 

 

 

 

장경각의 내부

 

 

 

 

 

소장 중인 팔만대장경 - 문화재 보호차원에서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해인사 인증 샷

 

 

해인사는 해발 610m정도에 위치해 있으므로 자전거 라이딩으로 오를 때는 조금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올라야 한다. 그러나 높이만큼 길이도 길게 오르므로 급격한 업힐은 없으니 느긋한 마음을 갖고 오르면 크게 힘들지 않고 오를 수 있다. 

 

해인사 입장료를 받는 곳에서 자전거로 올라 출입을 하니 무척 신기했던 모양이다. 매표하시는 분이 크게 호감을 표하는데, 그러나 해인사 출입이 통도사와 같이 자전거 출입에 대해 거부감을 가질 것 같아 이번에는 아예 자전거를 주차장 입구 행상상점에 맡기고 들어갔다.

 

 

    

 

 

 

 

 

 

 

 

 

 

 

 

 

 

 

 

 

주차장에서 해인사로 오르는 길

 

 

 

 

 

홍유동 계곡1

 

 

 

 

 

홍유동 계곡2

 

 

 

 

 

홍유동 계곡3

 

 

 

 

 

 

산재현(약530m) 정상 인증샷

 

 

합천부터 업힐을 시작하여 해인사 업힐까지 하니 힘이 몹시 빠진 상태에서 최대한 업힐을 피하고자 했으나, 결국 거창으로 향하는 길에서 500미터가 넘는 업힐을 하는데, 오르고 나니 정말 기진맥진해진다....^^  

 

하루에 오른 업힐 높이를 합하니 1500m가 넘었던 것 같다.....

 

 

 

 

 

거창으로 가는 길에서 수도지맥의 일부 산군들

 

 

 

 

 

거창버스터미널에서 저녁 5시30분차로 출발하여 4시간 만에 마침내 동서울 터미널에 도착하여 집으로 향하는 라이딩 도중에 구리암사대교가 반갑게 맞이하여 준다.

 

 

 

 

 

구리 태극기 광장에 LED조명으로 꾸민 작품이 무척 반가워서 한 컷....

 

 

 

 

 

 

 

마침내 4일간의 일정으로 계획한 부산/경남 라이딩을 큰 사고 없이 무사히 마치고 집을 귀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