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태종실록> 14년(1414년) 기사 내용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우리 동방의 전장(典章)과 문물은 모두 중국을 본받으면서 오로지 혼인의 예는 아직도 옛 풍속을 따라 양으로써 음을 따르므로 남자가 여자집에 들어가 아들과 손자를 낳아 외가에서 자랍니다. "
이러한 결혼 풍속을 학술용어로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혹은 서류부가혼(婿留婦家婚)이라 하며 이는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 그리고 조선시대 전기까지 지켜졌던 결혼풍습으로 ' 장가(丈家)든다' 혹은 '장가간다.' 라는 원래의 뜻 '장인 집에 들어간다(入丈家)' 란 말과 관련된 우리 조상들의 결혼제도였다.
조선시대 남자들이 처가살이를 했다하면 일반적 상식으로 납득하기 어렵지만 그 당시 문헌으로 증명하고 있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몇몇 인물들을 살펴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모범 여성인 신사임당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녀는 당연히 정성을 다하여 시부모를 모시며 시집살이를 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신사임당은 강릉 외갓집에서 태어나 거기서 줄곧 살다가 19세에 남편 이원수를 만나 결혼을 했다. 다섯 자매 중 둘째 딸이었던 그녀는 결혼한 뒤에도 한양에 있는 시댁을 몇 번 다녀온 것을 빼고는 내내 강릉 친정집에서 살았다.
신사임당이 친정생활을 정리하고 시집으로 간 것은 결혼한지 20년이 지난 뒤였다. 그때 신사임당의 나이 38세이고 48세에 세상을 떠났으니 신사임당의 대부분의 일생은 친정에서 산 것인데, 이는 이 시대에 결혼풍습이 일종의 처가살이가 전통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사례이다.
또한 사림파의 시조라 일컫는 김종직은 아버지 김숙자(1389-1456)가 밀양에 살고 있던 무남독녀의 딸을 가진 박홍신의 사위가 되어 처가가 있는 밀양으로 거주를 옮겨 살았고 이에 김종직은 이곳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박홍신이 죽자 무남독녀인 박씨 부인이 재산을 모두 상속받았고 외할아버지인 박홍신의 집에서 성장한 김종직은 외할아버지 제사를 맡았으며, 후에 김종직은 금산에 사는 창녕 조씨와 결혼 후 조씨가 물려받은 농장이 있는 처가가 있는 금산에서 거의 살았다.
영남 좌도의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며 영남 우도를 이끌던 성리학자 남명 조식도 외가인 경상도 삼가에서 태어나 결혼 후 처가가 있는 김해로 이사를 했고 15년 뒤 어머니가 돌아가자 외가인 삼가로 돌아왔다.
이렇듯 당대 내로라는 학자요 관리가 이러했으니 평범한 백성들의 처가살이도 쉽게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결혼 풍습이 혈족관계만이 아니라 재산 상속, 제례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려 때는 재산 상속이 아들 딸, 장 차남, 결혼 여부와 관련 없이 똑같이 나눠주었는데 이를 균분상속이라 한다. 특히 결혼한 딸이 부모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으면 남편이나 시집의 재산에 보태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자기소유가 되었는데 오늘날의 표현으로 부부별산제이다. 그리고 결혼한 딸이 자식 없이 죽으면 그 재산은 친정에 되돌려주게 되어 있었다.
재산 상속에 남녀차별이 없었으므로 제례(祭禮) 역시 아들 딸, 장 차남 차별이 없었다. 즉, 아들이 없으면 딸이 제사를 모셨고, 장남만이 아니라 차남, 삼남이 모시기도 했고 형제간에 돌아가면서 모시기도 했다. 한편 사위 입장에서도 처가로부터 재산을 상속받을 권리와 함께 처가의 제사를 지낼 의무를 동시에 갖게 되는 것이었다.
이렇듯 우리의 전통 결혼풍습은 남편이 아내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하기 때문에 아내의 가족, 친척 중심으로 생활하는 특징을 갖게 된다. 따라서 아내의 위치는 자연히 집안에서 상당히 높았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시대 초기부터 점차적으로 이러한 전통적인 처가살이 결혼풍습에 대하여 비판이 일기 시작했다.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조선의 문물제도를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한 삼봉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에서 "친영례(親迎禮)를 행하지 않고 남귀여가(男歸女家)하니, 부인이 무지하여 그 부모의 사랑을 믿고 지아비를 가볍게 여겨, 교만하고 투기하는 마음이 날로 자라 마침내 반목하는 데 이르러 가도(家道)가 무너지니" 다시 말해서 여자가 친정에 살면서 친정부모의 힘을 믿고 남편을 경멸하거나, 교만해져 남편과 반목하게 된다고 하는 얘기이다.
여기서 친영례란 중국 송나라 학자 주희의 <가례>에 명시되어 있는 결혼 풍습으로, 신랑이 신부를 데려와 신랑 집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신랑 집에서 사는 것, 즉 시집살이이다.
이렇듯 조선시대의 지배층에서 처가살이에 대한 비판이 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채택한 조선왕조는 개혁의 대상으로 모든 생활풍습도 성리학적인 윤리에 따라 바꾸려고 했다.
<세종실록> 17년에 내용을 보면 처가살이 결혼풍습을 바꾸기 위해 왕실이 직접 모범을 보여, 숙신옹주의 결혼이 친영례로 치러졌다. 그러나 그 당시에 사대부가는 남자 집에서 혼인 준비하는 것을 꺼려했으며, 혼인 준비는 여자 집에서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관례가 있었기에 친영례가 쉽게 정착이 되지 않다가 이후로 사대부가 자연스럽게 친영례를 치르기까지는 약 200여년의 세월이 걸리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다.
바로 간통 문제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간통사건이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조선 초 태조에서 성종 대에 이르기까지 조정에서 직접 다룬 간통사건만 들여다보면 749건이나 된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는 각자가 생각해 볼 노릇이다.
조선시대의 간통사건 중 대표적이며, 가장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어우동 사건이다.
실록에 의하면 태강수의 아내 어우동은 은그릇을 만드는 공인과 어울렸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쫓겨난다. 그 후 어우동은 수많은 남성들과 자유로운 애정행각을 벌였는데, 간통을 한 어우동에겐 극형이 내려졌을 뿐만 아니라, 효령대군의 손자며느리였던 어우동은 족보에서 그 이름을 지운다는 의견이 나왔고, 왕실족보인 선원록에는 어우동의 이름이 지워져 태강수의 처는 어우동이 아닌 덕산 신씨로 기록되어 있다. 어우동의 성은 박씨이므로 어우동은 그 존재조차도 지워져 버린 것이다.
조선시대 간통죄는 장형 100대에 처하는 중벌이었다. 유부녀는 여기에 10대가 더 추가됐고, 여자는 옷을 벗고 맨살로 형벌을 받게 했다. 그런데 어우동의 형벌은 장형이 아니라 사형이었다.
간통했다고 해서 사형까지 시킨 것은 그 당시에도 과도하다는 표현을 썼지만, 아마도 보다 도덕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강력한 법으로써 여성의 정절을 원했던 것 같다.
다시 결혼 풍습으로 돌아와서
그렇다고 중국의 친영례가 우리나라에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았다. 혼례식을 처갓집에서 하고 그 후 첫 아이가 출생할 때 까지 처가에서 사는 반친영례가 행해졌고, 점차적으로 처갓집에서 사는 기간이 차츰 짧아지면서 혼례식은 처갓집에서 하고 살림은 시집에서 하는 시집살이가 자리 잡게 되었다. 즉 고유의 전통이던 처가살이가 시집살이로 바뀌게 된 것이다.
본격적인 변화는 임진왜란 이후 17세기부터 였고, 이러한 결혼 풍습의 변화가 상속까지도 변화가 생겼다. 즉, 아들딸 차별없이 나눠주던 균분상속이 딸에게는 적게, 아들에게는 많이 주는 남녀 차별 상속으로, 또 여러 아들 중에서도 맏아들에게 많이 주는 장남우대 상속으로 바뀌어 갔다. 제사도 형제자매 간 돌아가며 지내 던 것이 딸은 지내지 않는 것으로, 또 아들 중에서도 맏아들이 지내는 것으로 바뀌었다.
결혼 풍습과 상속제도가 바뀌게 되는 주된 이유는 당시의 사회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동안 소수의 사대부 집안에서만 지켜왔던 성리학 윤리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일반 백성에게까지 퍼진 이유가 있고, 재산을 여러 자식들에게 분할하기보다 한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이 재산을 지키고 늘리는 데 유리하게 된 경제조건 등 사회구조 변화에 기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듯 결혼 풍습과 상속제도 변화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한 사회를 이루는 가족과 친족 구성, 사회질서, 사고방식, 가치관 등이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처가살이는 적어도 16세기 이전 남성에게는 자존심 구기는 일이거나 돈에 팔려가는 굴욕적인 일로 여기는 사고방식은 해당되지 않았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전기까지 천 년이 넘도록 행해온 처가살이는 남부끄럽고 특별한 일이 아닌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인 것이었다.
마치 조선 후기 이후 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의 시집살이가 당연한 일이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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